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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기 Mar 16. 2020

10년 뒤에도 우리는 무사히 늙어 갈 수 있을까?

야기하는 책_그레타 툰베리의 금요일

자신의 10년 뒤를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내가 지금보다 어렸을 때, 적어도 학교에 다녔을 때는 10년 뒤를 예상하기 쉬웠다. 10년 뒤? 명문대학을 다니고 있겠지(열두 살쯤엔 홍대에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거라 말했다), 10년 뒤? 회사를 잘 다니고 있지 않을까. 2020년의 나는 대학생도 회사원도 아니다. 특성화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대학은 선택지에서 배제했고 남들이 다 좋다는 회사는 1년도 더 전에 관뒀다. 


막연하게 짐작해봤자 배반하는 게 미래라지만, 최소한의 바람이라면 아픈 몸을 잘 수선해가며 죽지 않고 존중할 만한 사람이 되어 존중하고 싶은 사람들과 좁고 깊고 얕고 넓게 교류하는 것, 내 앞가림은 할 정도의 돈을 벌며 사는 것이다. 거기서 더 보태면 내 글이 많은 독자에게 가닿고, 기왕 그렇게 된 김에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벌고……. 


그 꿈이 나의 실력이나, 운이나, 기울어진 운동장과 무관하게 불발되리라고는 상상도 한 적 없다. ‘미래도시’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2020년을 맞아 가장 자주 뱉은 말이 ‘10년 뒤에는 지구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데-’이 되리라고는, 아무리 불안과 잡념에 머리를 처박은 인간에게도 예상 밖이었다.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 에어컨을 너무 많이 쓰지 말자, 자원을 아끼자- 따위의 표어는 공공 교육을 받을 때부터 지겹게 들었다. 해수면이 올라가고 있고, 자원이 점점 고갈되고, 아프리카인가 호주의 어딘가 멸종위기생물이 멸종되어 가며- 하지만 공장식 축‧수산으로 공급한 고기와 생선 반찬은 남기지 않고 먹어야 하며, 기업에서 열심히 찍고 있는 일회용품은 제재 없이 소비하면 된다. 


개개인이 플라스틱 빨대를 안 쓰고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정도로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한다. 지구는 너무 지쳤고, 빙하는 되돌릴 수 없는 규모로 줄어들고 있고, 이건 다 인간 탓이다. 친구들과 자조 반 환멸 반으로 ‘인간이 없으면 지구가 평온하다’라고 얘기했던 값의 결과물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라고 복기하기에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마 신자유주의일지 석탄과 석유를 마음껏 이용해 먹던 시절부터일지 1세계-라고 그들이 분류한 국가들-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걸 내가 되짚어 봤자 의미가 없다. 


나는 판도를 바꿀 권력도 환경오염과 지구 멸망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기술 개발이나 산림 보호에 앞장설 자본도 없다. 그럼 나는 이걸 왜 깨달아버렸을까. 왜 녹아내려 가는 빙하와 무자비하게 타오르거나 벌목되는 나무와 과잉 소비가 당연시되는 미친 자본주의에 진지해졌을까. 


그건 ‘왜 페미니즘이란 걸 감각하게 되었을까’를 고민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의문이다. 상황은 종종 너무 느리게 좋아지거나, 오히려 더 나빠 보일 때도 있다. 흐름을 거슬러,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혼자 20세기를 그리워하는 정치인이나 사업가나, 정치인도 사업가도 아니지만 누군가를 착취해서 얻어낸 평화롭고 뜨거운 20세기에 향수를 가진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문제는 그런 사람이 권력과 자본과 여론을 형성할 때 나타나고, 지금은 대부분 그래 보인다는 거다. 


모든 게 너무 과잉되어 있고, 그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기는 사회/문화를 목도할 땐 참담해지다가도 최전선에서 목소리를 내고 ‘나 하나로 바뀌지 않지만’을 서두에 두면서도 ‘그래도 나는 바뀌겠지’하고 생활 방식을, 일상을 새롭게 꾸려나가는 이들을 보면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해서 10년 뒤에 예고된 멸망을 늦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병들어가는데 여태껏 아무것도 모를 수 있었다는 게, 모든 게 잘 돌아갈 거라 믿었다는 게 어이없을 지경이다. 


나는 급진적이지도 예민하지도 않다. 오히려 둔하고 다른 사람이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하고 따라가는 데 급한 사람이다. 하지만 2020년을 살면 나는 무척 예민하고 급진적인 데다 부정적인 인간이 되어있다. 누군가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걸 알아도, ‘설마 지구가 망하겠어, 이대로 사는 게 뭐 어때서’하며 낙천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보면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만다. 


겨우겨우 따라가는 내가 이런 반응과 맞닥뜨리니,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를 목 놓아 외치는 그레타 툰베리와 그의 가족은 얼마나 과민한 괴짜 취급받을까. 물론 그들의 곁에는 여러 동료와 활동가들이 많겠지만, 자원을 열심히 낭비하는 SNS의 피드를 보면 여전히 주류는 인간이 누리는 기이한 풍요와 사치다. 


이들이 과민한 걸까, 저들이 방만한 걸까. 


창작 소재로만 여겨왔던 ‘아포칼립스’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21세기에는, 최소한 내가 살고 있는 동안은 겪고 싶지 않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채식을 하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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