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너머
* <공동선> 제177호 ‘두려움 너머’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어떤 희망의 기록 / 박현경(화가, 교사)
1.
플라스틱 통에 붉은 물감을 짠다. 찰박찰박 물을 채운다. 나무젓가락으로 물감을 갠다. 천천히 개고 또 갠다. 붉고 진한 물감물이 준비되면, 빽붓을 푹 적신다. 폭 15cm쯤 되는 크고 납작한 붓이다. 후두두둑 붉은 물을 떨구는 붓을 종이에 댄다. 힘껏 붓질을 한다. 넓고 긴 선을 긋는다. 긋고 또 긋는다. 하얗던 종이가 새빨갛게 된다. 종이 위에 빨간 물웅덩이가 생긴다. 적실 만큼 적신 뒤에 멈춘다. 마를 때까지 그대로 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야 마른다.
흥건했던 물웅덩이는 마르면서 꽃무늬를 남긴다. 물감이 고르지 않게 묻었던 자리마다 물결무늬가 남는다. 꽃무늬, 물결무늬가 어우러진 붉고 보송보송한 종이가 완성된다. 이제 크레용을 들 시간.
65×102cm 사이즈 붉은 종이 한 귀퉁이에 하얀 크레용으로 약 3×7mm 정도 되는 길쭉한 동그라미 하나를 그린다. 여기서 한 세계가 시작된다. 하얀 동그라미 옆에 또 하얀 동그라미, 그 옆에 또 하얀 동그라미. 벽돌을 쌓듯 계속해서 그린다. 한 줄을 다 쌓으면 그 위에 또 새로운 줄. 그림을 빨리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차라리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란다. 창밖으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하얀 벽돌을 쌓다 말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이 오면 출근 전까지 또 계속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하얀 벽돌 쌓기가 끝나 붉은 종이 위에 하얀 쌀알 무늬가 빼곡해지면, 귤색 크레용으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하얀 선들을 비껴가거나 덮어 가며 귤색 납작한 동그라미들을 쌓고 또 쌓는다. 상상했던 색채와 질감이 눈앞에 펼쳐진다.
날이 가고 밤이 가는 사이 귤색 벽돌 쌓기까지 끝나면 그대로 펼쳐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마침내 용기 내어 빨간 크레용을 집는다. 슬프면서 결연한 오른눈 그리고 왼눈을 그린다. 꽃송이가 된 눈물방울을 그린다. 짐승의 코와 입을 그린다. 턱에 붙은 귀를 그린다. 굵고 튼튼한 목을 그린다. 언덕처럼 솟은 날개를 그린다. 점점 자라나는 굵고 부드러운 선. 그렇게 천사의 형상이 생겨나면 하룻밤을 벽에 걸어 두고 본다.
마음이 괴로울 대로 괴로운 아침, 천사의 형상 위에 초록색, 파란색, 자주색 선을 긋는다. 가늘고 굽은 선을 난사하듯 긋는다. 뚜렷하던 천사 얼굴이 점차 흐려지고, 눈빛은 결연함 쪽에서 슬픔 쪽으로 기운다. 마음이 괴로워 계속 선을 긋는다. 천사가 몹시 지쳐 보일 무렵 비로소 멈춘다. 지치고 외로운 천사가 여기 있다.
2.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했던가.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이라고 했던가. 한때는 좌우명같이 공감되던 이 말들이 이제는 머나먼 나라의 메아리처럼 들린다. 지금 나는 마음이 꺾여 아프다.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또 다독였지만, 그러는 동안 마음은 더 많이 꺾이고 더 깊게 아파졌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가며 일들을 처리하지만, 그러는 사이 내 마음이 겪는 불안은 무겁고 시리다.
심한 우울과 불안, 공황 증세로 휴직을 했다가 복직을 한 지 이제 일 년. 작년 오월 복직을 할 때는 깨끗이 나은 듯 가볍고 쌩쌩한 컨디션이었고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에너지가 빵빵한 채로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그러다가 이토록 푹 주저앉다니, 나의 에너지는 고작 일 년짜리였던 걸까. 내 마음의 힘이 이토록 부족한 걸까.
높아지는 불안에 약을 다시 늘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 때나 솟는 울음을 꾹꾹 삼키곤 하는 요즘, 2년 전의 고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겁이 난다. 당장 다 그만두고 싶고, 다 포기하고 싶고, 다 놓아 버리고 싶다. 나를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는 이들에게 실망을 안기는 게 괴롭고, 내게 주어진 일들, 내가 헤쳐 나가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두렵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내게, 일을 내려놓으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도망가는 것 같아서 싫다’고 했더니 “안 죽으려면 도망가야지.”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확 솟았다. 요즘 자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이런 심정으로 물감을 개어 종이를 적시고, 그 종이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하얗고 작은 동그라미들을 빼곡히 그리고, 그 위에 귤색 동그라미들을 쌓았다. 심장을 좀먹는 불안을 직시하며 크레용 선을 긋고 긋고 또 그었다.
오늘 오전 이 그림을 완성하였지만, 나의 불안, 나의 괴로움이 끝나지 않았기에 내 작업도 새롭게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 그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4.
남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듯 내 그림 <천사 8>을 가만히 바라본다. 꺾이고 상처 입은 마음의 잔해들과 끈질긴 불안이 한없이 묻어난다. 그 와중에 눈에 띄는 안간힘이 있으니, 이 그림을 그리던 그 불안하고 괴로운 사람은, 불안하고 괴로운 중에도 그림 속에 희망의 코드를 심어 놓았구나.
천사의 눈물이 꽃송이가 된 것처럼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되돌아보면 뭔가 좋은 것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순진한 희망, 그 근거 없는 희망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구나. 천사의 슬프고 흐린 눈 아래, 턱에 붙은 귀. 그래,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 어떤 낮은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직 있구나. 그 귀 아래 굵고 튼튼한 목은, 그렇게 굵고 튼튼한 사람이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일까. 아니면, 자기 안에 숨어 있는 힘이 저렇게 드러난 걸까.
그리고 색깔. 철철 우는 마음으로 그렸으면서도 색깔이 참 곱다. 다 놓아 버리고 싶다면서도 하얀 동그라미, 귤색 동그라미들을 참 야무지게 그렸구나. 이 그림을 그린 그 불안하고 괴로운 사람은, 불안하고 괴로운 중에도 어쩔 수 없는 희망꾼, 꿈쟁이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울면서도 기어코 날개를 그렸겠지.
5.
그러므로 훗날 이 그림을 보며 나는 끝도 없이 움츠러들고 가라앉던 마음과 끈덕지게 다시 일어서던 희망을 동시에 떠올릴 것이다.
흥건했던 물웅덩이는 마르면서 꽃무늬를 남긴다. 물감이 고르지 않게 묻었던 자리마다 물결무늬가 남는다. 천사의 눈물은 꽃송이가 되고, 죽고 싶은 마음으로 그려 낸 그림을 보며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