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4년 10월호 게재 글입니다.
제목: 네 얼굴을 만지려고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1.
“너랑 함께 살려고 이 땅에 왔어. 날개가 있지만 난 이 땅에 있지. 하늘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이 세상은 아름다워. 서로 다른 색깔들이 얽히고설킨 촘촘한 그물 같은 오묘한 이 세상.
내 한쪽 귀는 위쪽에, 반대쪽 귀는 아래쪽에 달렸어. 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를 두루 들으려고.
내 왼눈, 오른눈은 서로 다른 빛깔이야. 서로 다른 존재들을 잘 살펴보려고.
나는 사람의 눈과 귀, 짐승의 코와 입, 식물로 된 발을 지녔지. 어떤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으려고.
내 눈에는 보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내 눈에는 보여, 너의 조용한 기쁨.
내 눈에는 보여, 너의 은밀한 고통.
하지만 함부로 얘기하지 않을 거야.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허락 없이 네 세계를 침범하지 않을 거야. 나는 너를 믿으니까.
그냥 여기 있을게, 네 근처에.
잠자코 들을게, 네 얘기를.
네가 허락해 주면 너에게 다가갈게.
내 날개로 너를 포근히 안아 줄게.
너랑 함께 살려고 이 땅에 왔어.
네 얼굴을 만지려고 이 땅에 왔어.”
천사가 속삭이는 이 말들을 크레용으로 받아쓴 것이 바로 ‘천사’ 연작이다. 지금까지 열네 점의 ‘천사’ 연작을 그렸고, 앞으로도 계속 그릴 것이다.
2.
지난 2월 파리 벨빌에서 전시를 할 때, 함께 전시한 작가 발레리가 자신의 친구 놀벤과 셋이서 2025년 2월에 ‘천사’를 주제로 전시를 하자고 내게 제안해 왔다. 나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날부터 천사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을 이어 갔다.
당시 나는 막 활동가로서의 삶에 발을 내딛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이 나의 화두였다. ‘활동가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가?’라는, 삶의 자세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연히 ‘천사’라는 주제는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나의 고민을 담게 되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고 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함께해야 진짜 힘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천사는 ‘천국에서 인간 세계에 파견되어 신과 인간의 중간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원을 신에게 전하는 사자(使者)’라고 한다. 만일 누군가가 신의 뜻, 아마도 ‘사랑’을 나에게 전해 주고, 나의 기원을 있는 그대로 귀 기울여 들어 주고, 또한,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해 준다면, 나에게는 그 사람이 바로 천사이다. 내게 천사로 온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천사들도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또한 나 역시 어떤 사람들에게 천사라는 걸 안다.
3.
이렇게 ‘세상 한가운데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고민하며 ‘천사’ 연작을 그렸다.
고고하게 천국을 지키기보다는 세상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하기로 결심한 자의 삶, 강요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고, 묵묵히 곁에 있어 주는 사랑, 이것을 생각하며 몇 번이고 코끝이 찡해지는 이유는 내가 이미 그런 삶,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연작들을 그리면서 선을 참 많이도 그었고, 그 수많은 선을 그으며 또 수없이 울고 웃었다. 천사를 그리는 동안 점점 힘과 의욕을 되찾았고 중요한 결심도 하고 삶에 대한 사랑이 전보다 더 커졌다. 천사를 그리는 동안 천사가 나를 찾아와 준 것이다. 이 연작들에 매달려 있던 한 순간 한 순간이 얼마나 값졌는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림_박현경, <천사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