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양연화는 사랑의 결정체를 결말로 두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처럼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은 아이러니하게도 꽃이 피기 직전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꽃은 피는 동시에 곧 떨어지기에 정작 사랑이 빛나는 때는 수많은 미완의 순간에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소려진과 주모운은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라는 걸 알게 된다. 서로를 공감하게 된 둘은 함께하는 시간이 늘며 사랑의 감정을 키워 간다. 서로의 손이 스칠 때, 전화벨이 울릴 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방에서 서로가 있는 방을 두고 기대고 있을 때, 마음은 서로를 향해 기운다. 그 사랑은 격정적인 애정의 관계로 전환된 다거나 미래를 약속한다거나 하는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다. 처음 그들이 만나고 설레고 서로에게로 기운 마음이 봉인된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주모운은 소려진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보다는 그가 말한 옛날이야기에서처럼 캄보디아의 어느 사원에서 구멍 난 돌에 자신의 진심이 담긴 마음을 속삭이고는 봉인한다. 소려진 또한 남편과 헤어진 후 주모운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그 장소로 돌아가 살아갈 뿐이다. 제대로 사랑이라고 부르지도 못하던 때로.
영화는 매듭지어진 결말로서의 사랑에 의문을 던진다. 소려진은 “결혼이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라며 결혼한 후 오히려 자신을 잃어가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또 소려진과 주모운은 언뜻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배우자가 그 사랑을 배신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완성으로서의 사랑에 의문을 표한다.
소려진과 주모운이 서로의 사랑을 애써 숨기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간직하고자 할 뿐, 마음을 나누고 서로의 사랑을 하나로 합치지 않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도덕적인 책무 탓도 있지만, 둘은 한번 당한 배신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매듭짓거나 결론지어질 수 없는 걸 알기에, 상대의 마음을 침범하거나 내어주지 않는다. 만개한 꽃이 곧 떨어지는 걸 아는 듯, 둘은 꽃봉오리를 틔우지 않은 채 활짝 핀 꽃을 생각하고 간직한다.
영화는 이 미완의 순간들을 시각적 장치를 통해 길게 늘여 관객에게 보여 준다. 느린 화면으로 상대가 되어 인물을 바라보는 듯하기도 하고, 툭툭 끊기는 프레임을 통해 마치 하나의 순간순간들을 강조하듯 나타낸다.
또 인물들 역시 사랑에 있어 미완의 순간들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자 사랑의 결정체인 걸 아는 듯 장면을 반복하기도 한다. 가령 처음 주모운이 소려진에게 시간을 같이 보내자고 할 때, 소려진은 그 말을 다시 하게 한다.
마치 ‘대답’이라는 매듭으로 가는 시간을 잡아두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주모운은 소려진에게 이별의 순간을 연습하자고 한다. 이 역시 결론을 맺기 전 사랑의 순간을 잡아두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핏 측은하고 슬픈 장면들임에도 어떤 격정으로 향하는 그 과정의 감정은 결론으로 도달했을 때보다 고귀하며 경건하다. 그 과정에는 쉼 없는 긴장과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에너지가 요동친다. 결론을 향해 가려고 하는 건 안정을 취하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며 쉬운 일이다. 하지만 아름답진 않다. 더욱이 무상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하는 사랑은 결론은 없으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상태에 가깝다. 결론짓지 않고 다만 마음을 맡길 뿐일 때 사랑은 그 본질로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