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바람' 돋보기
영화 <Her>는 언뜻 남녀간의 사랑을 소재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운영체계 사만다는 한 인간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인간을 똑같이 더할나위 없이 사랑할 수 있으며 한 개인에게 머물기엔 그 사랑은 너무 빨리 완성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결국 한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세상이 한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말한다. 그 세상은 종교에서는 신, 우주에서는 존재 본질로도 비유될 수 있다. 나아가 하나의 육신에 갇힌, 소유욕에 사로잡힌 인간 역시 그 외연을 확장해 연인 간의 사랑의 감정을 넘어 작은 세상이 되어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주인공 테오도르는 컴퓨터 운영체계, 즉 OS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많은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추억을 쌓는다. 다른 연인들처럼 서로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품기도 하고 때론 다툰다. 시공간이라는 물리적 제약을 받는 인간과 물리적 제약이 없는 OS의 생각과 경험은 다르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들의 사랑은 이런 태생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작별 인사를 건넨 사만다는 다시 테오도르에게 돌아올 여지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만다는 여전히 테오도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육체가 있지 않은 사만다는 처음에는 인간의 육체를 원하고 그럴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슬픔을 느끼지만, 이를 극복하고 테오도르에 대한 사랑을 완성한 것이다.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떠남으로써 그녀의 사랑을 완성한다.
처음엔 이런 사만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테오도르도 마침내 그런 사랑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는 얼마 전 이혼 절차를 마무리하려 만났던 전처 캐서린에게 그동안 자신의 고집과 잘못에 대해 사과하며 언제 어디서나 사랑할 거고 응원한다는 편지를 적어 보낸다. 얼마 전까지 그녀에 대한 꿈을 꾸고 관련된 걸 볼 때마다 그녀가 생각나던 그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서 그는 그녀와의 관계에 진정한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그녀와의 사랑은 영원으로 남게 된다. 더이상 그의 주관적인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은 그와 그녀의 둘 기억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테오도르의 사랑 역시 독점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에게 대신 편지를 써 주는 것을 업으로 하는 테오도르 역시 사만다처럼 잘 알지 못하는 무수한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표현한다. 비록 의뢰인을 가장해 대신 써주는 것이지만 그의 사랑은 무수한 대필 대상 만큼 무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랑은 처음엔 그의 가족에게서, 그의 연인 캐서린에게서, 사만다에게서, 또 그 훨씬 이전엔 그에게 삶을 허락한 신에게서 받은 사람이다. 그 사랑의 본질은 신이기에 그의 사랑 역시 신의 사랑처럼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이별을 말하면서도 이런 사랑은 해본 적 없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동의하고 “이젠 사랑을 알아”라고 말하는 건 위선이 아니다. 사만다는 어떤 누구와도 상대가 원하는 최선의 관계에 맞는 사랑을 할 수 있고 그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이상형에 가까운 사랑을 깨닫고 동시에 그에 맞는 사랑을 주는 것이다. 이런 사만다의 사랑은 신 또는 만물의 본질이자 운용 원리 자체인 우주의 사랑과 비유될 수 있다. 우주는 인간에게 그에 맞는 삶을 내려주고 그 삶이 인간을 가장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고통이나 행복으로 분류되지만, 한 인간을 품는 삶은 인간을 증요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육체와 불완전한 정신에 갇힌 인간의 고통과 이별, 외로움 등 우주적 관점에선 피상적인 것에 사로 잡혀 괴로워한다. 그러고는 운명이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하지만 본질은 그렇지 않다. 삶은 언제나 그 최선의 방식으로 그가 품은 인간을 사랑한다. 다만 인간이 그 잣대로 괴로워하고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독점하려 한다.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은 나만의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법과 제도가 있어 결혼 관계로 유지될 순 있어도 한 사람에 대해 영원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인이나 사물에 한정된 사랑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를 사랑하는 가운데 개별 존재들에게 향하는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 그 전제는 신 또는 우주가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빚어낸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