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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y 09. 2024

답안 작성까지가 시험시간입니다


6개월은 괜찮았다. 조곤조곤 설명하기 딱 좋은 공백이다.

막 FA에 나와 제값 받는 선수인 양했고 자신감에 경력 기술서를 재정비해서 부지런히 취업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좀 덤벼 볼 만한 곳은 채용 단계가 지나치게 많아서 최종단계까지 족히 두 달은 걸렸고, 한두 달씩 점프 점프하다 보면 어느새 반년, 이러다 일 년은 금방 잡아먹을 게 뻔했다.


이력서 말고도 무슨 계획서를 내라지 않나 서술 시험도 보라고 하질 않나, 모듈이니 뭐니 하는 NCS도 봐야 했다. 제출하다 보니 PT 제안서, 계획서는 이것들이 내 아이디어만 쏙쏙 뽑아 먹으려 드는 것 같아 무급으로 노동을 착취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너희도 다 이런 단계를 거쳐 입사한 거 맞아?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데 요구하는 절차와 서류가 정당한가 분노를 하면서도,

내야지, 해야지. 하라면 해야지.

입사도 하기 전에 '하라면 해야지'를 시전하면서 6개월은 괜찮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함께 일했던 기관이기도 하고 한번 일해 보고 싶었던 곳에 준비도 없이 NCS 시험을 보러 갔다.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 오답 풀이를 할 때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다.

"한글을 읽을 줄 아는데 틀릴 문제가 어디 있냐?"


그래 나는 한국인이다. 한글을 읽을 줄 알면 못 풀 문제가 없다.

몰라서 용감했고 경험은 편협했다.


감독관은 누굴까, 직원인가, 고용된 감독관인가, 휴일 출근하느라 고생이 많네. 뭐 그래도 대휴를 받겠지. 다들 연령대는 어찌 되는지 속으로 오만참견을 다하고 시험을 치렀다.

아니 한글을 읽었다.


"그만, 멈추세요."

늘 그렇듯 꼭 한 줄 정도는 제일 뒷사람이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멈추세요. 걷으세요."

"잠깐만요, 답만 옮기면 돼요." 남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는데 너무 커서 흡사 울부짖는 줄 알았다.

"답안 작성까지가 시험시간입니다. 멈추세요. 부정행위입니다."

"답안 작성 시간을 주세요."


곳곳에서 짜증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씨."

"얼른 내세요. 누군 시간이 남았나?"


겨울 시골집 한기만큼 서늘했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더니 치열하고 처절한 생존 중이었다.

당연히 부정행위다. 정당한 지적이고 확실한 제재가 맞다.

그런데도 서글펐고 착잡했다.


이력서에 사진을 필수로 붙여서 내던 시절, 가족 학벌까지 상세히도 적어내던 시절보다 훨씬 인권이 보장되었고 객관화되었는데 길어진 채용 단계마다 느끼는 굴욕감과 비참함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엄격한 기준으로 훌륭한 인재를 뽑고 있는 게 맞는가. 걸러내기 위해 억지로 만든 채용 단계들. 준비하는 사람을 자꾸 시험에 들게 하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대다수는 아니겠지만,


내가 함께 일한 이 기관 직원은 이렇게 입사하지 않았는데.

내 친구도 모 공공기관에 이렇게 입사하지 않았는데.

내가 아는 전 직장 동료도….


블라인드 채용 앞에 놀이공원 패스트 트랙 이용권을 사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가 되고 만다.

 


서류는 빈칸만 성실히 채워도 어지간해서 떨어질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NCS가 한글만 읽을 줄 안다고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경험하고서야,


명분인가 구실인가,

이놈의 세상, 더러워서 밖을 나갈 수가 없다며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또 놀 수밖에.




사진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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