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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y 08. 2024

막살기로 결심하고서


백수가 제일 좋아하는 아침이다.

춥고 비 오는 날.

유독 더 출근하기 싫어서 멱살 잡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현관문을 나서는 춥고 비가 오는 날.

나는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목까지 끌어올린 이불속에서 빗소리를 듣다가 시간이 아까워 냉큼 창문부터 연다. 콘크리트 젖은 내가 훅 들어온다. 눈에 막이 낀 것 같은 방충망을 열고서야 비가 씻어낸 세상이 온전히 보인다.

비닐봉지에 물을 채운 것도 아닌데 묵직하다. 빗방울은 빗방울이란 말이 어찌 이리도 잘 어울릴까. 누가 지은 이름일까.


비 오는 날 머리에 꽃 꽂은 미친 아이가 되어 해맑아지는 아침이다.

이렇게나 밝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는데,


아침마다 회의실에서 죽상을 하고 앉아 금방이라도 보라색 진물을 뿜어낼 것 같은 군소 꼴을 만든 자가 누구인가. 혼자 있고 싶어 점심도 안 먹게 만든 자가 누구인가. 어디 수용소에서 탈출한 서사 있는 주인공 대우를 해준다.


비가 오는 날은 영화를 봐야 한다.

커튼을 친 어둠은 흐린 날의 감성을 따라잡지 못한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음침한 날씨는 회사 명절 상여금만큼이나 줄 때 냉큼 받아 챙겨야 한다.



.

"혹시 저 때문에 사표 내신 건 아니죠?"

회의 때 발언이 강압인 걸 본인이 모를 리 없다. 기강 잡듯 던진 업무가 부당했음을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걱정인 듯, 다짐을 받아놓는 듯, 사직서를 결재도 하지 않고 상담이라 치고 떠보느라 건넨 말이다.

   

맞다고,

너를 포함 해 상대도 하기 싫은 사람 천지라 사표를 내는 거라고 말 한마디 못 하고 퇴사를 하던 날,

막살기로 결심했다.

'나이스한 퇴사'를 해야 하는 백만 가지 이유를 경험해 봐서 알지 않던가. 조용히 퇴사해야 하는 수천 가지 이유를 알지 않던가.

말하지 못하는 사회관계, 인간관계가 억울했고, 퇴사하는 마당에 제대로 말도 못 한 성격에 화가 나서 다짐했다. 사회를 벗어나면 분통해서라도 막살겠노라.

 

말 못 하는 사람으로 살다가 말도 못 하고 퇴사를 하고 나서 방언을 쏟아내듯 결심했다.  

더러워서라도 막산다.

내가 소중해서라도 막산다.


.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짓을 하느라 이불 위에서 포카칩을 뜯는다.


사람을 누가 사회적 동물이라 했던가.

이렇게 적막한 공간에서 이불을 덮고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한데.


장마였으면 좋겠네.


‘띵-’


후원금이 자동이체 됐다는 문자가 들어왔다.

자동이체를 정리하지 않았구나.


-기부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원동력이 되지, 기부금을 끊지 마.-

-일자리를 구해야 기부를 하지. 네 처지에 기부할 때야?-


통장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소비였던, 윤리적인 소비였던 기부금과 후원금을 못 이기는 척 끊어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아직 멀었구나.

좋은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이구나.


결국 아동 도시락 후원금이 입금되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괜스레 포카칩도 내려놓아 본다.


틀림없이 아까까지 맑고 고운 소리였던 빗소리가 추적추적 청승맞아지는 순간이다.




사진출처: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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