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놀고 있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인표 May 07. 2024

놀기로 다짐하던 날


퇴사를 결정하고 나면 물건부터 산다.

길어질 백수 생활을 대비하는 것이다.

남들은 이직할 직장을 찾아놓고 퇴사한다는데 한 번도 그렇게 퇴사한 적이 없다. 끝까지 버티다 버티다 포기하느라 퇴사했기 때문이다.


물건은 그때마다 다르긴 하지만 통상 핸드폰 충전기, 외장하드처럼 쓰다가 반드시 망가지는 소모품을 산다. 이번에는 크게 마음먹고 수채화 물감을 샀다.


신한 최고급 전문가용 수채화물감.

이름부터 마음에 든다. 전문가가 쓰는데 그것도 최고급이란다.

아르쉬 코튼 100%도 쟁여뒀다. 쉬는 동안 그림을 그려볼 요량이다.


막상 백수가 되고 나면 그림이 웬 말인가,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소비는 과욕과 과소비가 된다. 사지도 못하고 자책하며 신세를 한탄할 게 뻔하다. 그러니 조삼모사일지라도 지갑이 두둑할 때 미리 질러두면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는 슬기로운 백수 생활이 된다. 


백수도 무슨 경력직이라고 그간 경험에서 습득한 노하우인 셈이다.


백수가 된 첫날은 실감도 나지 않지만 내심 알람 없이도 일찍 일어난 나를 대견히 여긴다. 몸에 밴 성실함. 아직 동물적 감각이 살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불속에서 가만히 누워 출근하는 이웃을 소리로 지켜본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느라 타일 구르는 소리, 문 열고 닫히며 나는 도어록 전자음, 엘리베이터 오르내리는 기계 소리.

중문 열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곧 도어록 소리가 나겠군.


3층이 출근은 제일 빠르다. 오전 6시 8분. 직장이 아주 멀리 있는 모양이다. 다음 7시 10분부터는 어느 층이랄 것도 없이 줄줄이 집을 나선다. 우리 옆집 남자는 7시 34분. 늦으면 7시 40분이다. 키는 나보다도 작고 체격이 엄청나게 커서 어지간히 둔해 보였는데 출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걸 보면 정말 성실한 사람이 틀림없다. 항상 도어록 소리에 시계를 보고서야 7시 34분인 줄 알아챌 정도다. 그러다 어느 날 소리가 나지 않기라도 하면 내가 더 불안해진다. 늦잠을 잔 건 아닌지, 쓰러진 건 아닌지, 연가를 냈나,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니야 따위 하등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사느라 바쁜 도어록 소리, 사는 티가 나는 도어록 소리.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백수인 게 들킬까 봐 아무도 없는 척 이불속에서 몸을 말아버린다.


8시 30분이 되면 엘리베이터 소리가 멈춘다.

갑자기 다들 어디 갔나 하다가, 내 세상이구나 하다가, 신나게 뭐 좀 해볼까 하면서도 적막을 잠시 둘러본다.


적막.

얼마 만에 느껴보는 적막인가. 소머즈처럼 귀로 전파를 보내며 소리를 찾아보지만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짜증 나기만 하던 전화벨 소리, 통화 소리가 드디어 들리지 않는다. 소리는 소린데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던 사람들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우리 집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아직 수채화 물감은 손도 대지 않았다. 그거 말고도 할 일이 많다. 전화번호도 차단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한다. 퇴사 전 시공간에 묻어 있던 흔적은 다 지워버리고 말겠다.



사진출처: 본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