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 좋았다.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역대급 태풍으로 집이 침수되기 전까지, 그로 인해 아버지 묘가 일부 유실되기 전까지 어쩌면 가장 좋았다.
이후에도 진절머리 나는 날은 아니었고 평소에도 출근하기 싫은 아침, 그저 집에서 책이나 읽고 영화나 보면 딱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어둑한 날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처음으로 비가 오는 날이 서글퍼졌다.
녹아버리듯 뭉개진 채소와 과일을 보며 천정부지로 치솟을 식재룟값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었구나, 먹고사는 게 걱정이구나.
결혼도 하지 않고 애도 낳아본 적 없지만,
서글프게 나이가 들었다.
_
비가 오는 날은,
발목이 댕강해 신으나 마나 한 장화만으로도 할 게 많은 날이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발로 차는 일, 운동장에 고인 웅덩이에 살포시 발을 담그고 양말이 젖는지 살피는 일, 큼직한 호박잎에 모인 물이 언제 쏟아지나 발을 대고 기다리는 일.
그러다 시멘트 바닥에 냅다 누워 빗속에서 버둥대며 숨이 넘어가도록 웃었다.
이제는 내 기억인지, 책에서 읽은 장면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단지, 숨이 넘어가도록 웃던 날이 서글퍼졌을 뿐이다.
그저 비가 오는 날이라 서둘러 화분을 내놓고 내친김에 창틀 청소를 해야 하는 분주한 아침이다.
대민 지원을 나가야 하는 군인이 걱정이고, 하수구에 습관처럼 담배꽁초를 던지는 사람이 혐오스러운 아침이다.
사진 출처: Adobe Stock @s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