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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후 4시

연결이 끊어지고 나서야

by 빌려온 고양이


“다음 주 수요일이요?”

“예약이 많이 밀려서요.”


전화를 끊고 요일을 따라 손가락을 접었다. 다섯 손가락이 넘어간다.

6일, 에어컨 수리도 아닌데, 6일은 6개월만큼 까마득했다.


인터넷이 먹통이 됐다. 동시에 휴대전화가 벽돌이 되었다. A/S를 접수한 뒤 평소처럼 앱 몇 개를 돌리고, 웹페이지를 조금 둘러봤을 뿐인데, 데이터 사용량이 50%에 도달했다는 문자가 왔다.


웹툰, 릴스.

나의 야동 같은 웹툰과 릴스를 볼 수 없다니-


영화 <기생충> 속 기우처럼 휴대전화를 들고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았다. 수맥 찾듯 Free Wifi를 쫓았다. Wifi가 벽을 타고 흐르는 것도 아닌데, 급기야 휴대전화를 벽에 대어 본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채널이 변경되었다는 공지가 눈에 들어왔다. TV는 6개월 만이다. 백여 개가 넘는 채널을 수십 바퀴 돌렸다. 십 분도 안 돼 꺼버렸다. 레거시 미디어가 망가진 게 아니라면, 콘텐츠에 내가 망가진 것이리라.


책상 위 책을 들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반납일을 하루 남기고 첫 장을 펼친 것이다. 삼백여 페이지를 단숨에 읽고, 특유의 도서관 책 냄새를 스읍- 깊게 들이마셨다.

좋아하는 냄새, 좋아하는 책.

잊고 있었구나.


해가 넘어가는 시간을 거실에서 보내다 보니 조명이 필요했다. 불편해야 절실해진다.

9개월 만에 거실 조명을 갈았다. 불이 들어오는 거실, 개안한 듯 환하다.


밝아진 거실이 구석구석 눈에 들어왔다. 어디 멋대로 자라보라며 밀어두었던 플로리다 뷰티가 미친 여자 머리같이 거실 바닥에 늘어져 있다. 공중 뿌리에 맞춰 줄기를 잘라 긴 유리병에 꽂았다.


“깡총해졌네. 어때? 또 새순 낼 수 있겠어?”

단단한 껍질을 둘러쓸 때까지 모른 척한 게 미안해 괜히 말을 걸었다.


그렇게 다섯 권의 책을 읽고, 영화를 세 편 보고, 망가진 조명을 교체하고, 화분을 돌보고 나서-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는 날, 습기에 눌린 공기가 숨을 막던 날,

올여름 들어 두 번째로 에어컨을 켜놓고 기다릴 만큼 소중한 기사님이 드디어 오셨다.


삼십 분이면 된다던 작업은 한 시간이 넘어갔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작업하는 모습을 보는데, 그의 등이 격렬했다. 조끼 등에 ‘파업 투쟁’이라고 적힌 천이 옷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비정규직 차별에 맞선 규탄.

네 귀퉁이를 핀으로 붙인 빛바랜 천, 잔뜩 웅크린 그의 등이 극렬하게 외치는 듯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선풍기를 그가 있는 방향으로 조용히 돌려놓았다.


_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니 자꾸 거실로 나오게 된다.

가족들이 TV 앞에 모이던 저녁, 휴대전화가 없어서 그게 참 좋았던 시절로 잠시 돌아간다.


같은 통신사를 쓰는 여러 세대 중 우리 집만 인터넷이 안 되는 상황은, 아마 누가 나를 일깨우려고 보낸 여섯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소리를 내려놓으라고,

손에 쥔 것을 놓아버리라고.





사진 출처: Unsplash의 Caique Mor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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