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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 삼거리에서 Jan 03. 2020

200개 회사에서 달랑 전화 한 통

편의점 알바 합격하기


-- 어랏, 최저 임금은 자영업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나이에 왜 굳이 위아래 옆에 사람들이 있어 얽히고설킨 회사에 들어가려 하지? 자영 업소에서 알바하면 같은 최저 임금이라도 훨씬 자유롭지 않나? --





20년 자영업을 접기로 했다. 수 억 투자하고 몸 써서 노력하고 머리를 쥐어짜도 이익 내기가 어렵다. 급기야 적자,  하나 인건비조차 못 번다. 전업해도 업종 구분 없이 대동소이. 자영업 시대가 간 거다. 다행인 건 아들 둘 교육이 끝나가니 지출이 많이 준다. 한편 최저 임금이 몇 년째 가파르게 상승하고 노동자 권리가 강화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사업 정리해 자금을 회수해서 빚을 갚고 월급 받아서 생활비에 보태자.

헌데 나이가 58세인데? 써 줄까? 수많은 일자리 중에 나 하나 일 할 곳 없으려고. 자기소개서를 정성 들여 작성하니 A4 용지로 10쪽 분량. 그 속에 나의 열정, 창의력, 도전 정신, 경력, 성과, 성격, 체력, 신용 등 채용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그리고 잡코리아에 채용 광고를 올린 회사에 지원한다.

처음엔 거주 지역으로 지원했다. 그러다 서울, 경기 지역으로, 다시 전국으로 확대. 처음엔 경력 관련직에서 무경력 가능인 생산직, 경비직으로 확장했다. 정규직, 비정규직, 임시직 구분 없이. 혹시 내가 몸값을 너무 낮춰서 연락이 없나 싶어 헤드헌터에게 임원, 사장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지역, 업종 직위 구분 없이 지원하다 보니 200곳이 훌쩍 넘는다.

전화 단 한 통 받았다. 면접 보러 오란다. 야호, 드디어 나를 알아보는 군. 지역 내 화장품 유통 겸 제조회사다. 올커니, 내 경력 써먹기에 딱 좋다. 여기에서 나의 모든 역량을 쏟자. 내 한 몸 바쳐서 향토 기업이 성장하면 젊은이들 일자리가 창출되니 보람도 크다. 월급이야 최저 임금은 줄 터이고. 무엇보다 200곳 지원해서 단 한 번 기회다. 30년 전 대기업 이후 첫 채용 면접.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회사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 모은다. 사훈, 매출, 이익, 사업 내용, 대표이사, 언론 보도 등등. 이발하고 목욕재계하고 자기소개서  부 출력해서 면접 보러 회사에 20분 전에 도착. 건물 사무실여기저기 둘러본다.

면접장. 차를 내온 직원에게 물으니 오늘 면접은 나 한 명이란다. 20명 정도가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 회의실에서 넓고 긴 밤색 우드 탁자의 중앙에 이사와 채용 담당 젊은 부장과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는다. 인터넷과 인맥을 통해 이사가 회사의 주인이자 의사 결정권자라는 것, 성격은 어떤지, 부장은 이사와 인척 지간이라는 거는 미리 알아 두었다.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면접 시작.

이사:자기소개서 봤어요. 열정적이고 경력이 특이하고 희망 연봉도 제일 낮아서 보자고 했어요.  
나:자기소개서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떤 일을 맡겨도 만족하실 겁니다.

이사:특판 대리점 하면 잘하실 것 같네요. 지역 분이니까 연고 활용해서 기업이나 단체에 저희 화장품 세트를 특판 하는 겁니다.
나:네? 대리점요? 대리점은 제가 투자해야 하잖아요. 직원 모집 광고 보고 지원했습니다.

이사:대리점 제안하려고 보자고 했어요.
나:사업은 할 만큼 해서요. 이젠 그 경력을 회사를 위해 쓰고 싶어서 지원한 겁니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특판 대리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훨씬 크게 매출을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사의 조직과 시스템을 활용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있습니다.

부장:어떤 거지요?
나:큰 그림만 우선 말씀드리지요. 년 1조 원 규모의 화장품 시장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핵심 짚어 준다. 그러고 나서, 대리점은 개인 사업이고 구역이 한정되어 있지요. 저를 크게 써 보세요. 월급은 주고 싶은 만큼 주시고 이익이 크게 나면 그때 조금 주시면 고맙고요.

부장:듣고 보니 그렇네요. 상세히 듣고 싶습니다.
이사:먼저 특판 대리점을 했으면 합니다. 
나:이사님, 죄송합니다만 그건 곤란합니다.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기  어렵고요. 대리점이든 직원이든 신시장이든 하나를 정해 전력해야 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직원 채용 면접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부장님, 사업 계획은 기밀입니다. 채용하시면 회사의 일원으로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장: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신시장에 대해서 검토하고 싶습니다. 이사님과 상의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나:회사에서 잡무든 생산직이든 통역이든 영업이든 마케팅이든 맥가이버처럼 다용도로 마음대로 쓰시면 됩니다. 최저 임금이니 누구든 써야 할 거면 제가 나을 겁니다. 큰 사업의 기회에 대해서는 채용 후 검토하시지요.

부장:꼭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나:긍정적인 연락 기대합니다.

이사 와도 인사를 나누고 면접실 나와서 회사 겸 화장품 공장의 생산 활동, 입지 등을 찬찬히 둘러본다.

이게 다다. 두어 달 200여 회사 직원, 임원 모집에 정성 들인 A4 10쪽 분량의 자기소개서로 지원해도 연락은 단 한 곳뿐. 그것도 면접 보니 내 돈 투자해서 대리점 하란다.


가만히 따져보니 다 나이 탓이다. 10쪽 자기소개서에 실린 모든 건 중년이라는 이유 하나로 싸그리 묻히는 거다. 기업, 중견기업은 그렇다 치자. 중소기업, 소기업도 똑같다. 기존 기업은 그렇다 치자. 벤처기업도 똑같다.

얻은 건 있다. 무엇이든 샅샅이 훑다 보면 건지는 게 있기 마련. 그건 소수 대기업이나 공기업 외에 대다수 중소기업은 하나같이 최저 임금이라는 거다. 월 175만 원이다. 다들 그거 맞춰주기도 버거운 거다.

어랏, 최저 임금은 자영업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나이에 왜 굳이 위아래 옆에 사람들이 있어 얽히고설킨 회사에 들어가려 하지? 자영 업소에서 알바하면 같은 최저 임금이라도 훨씬 자유롭지 않나? 그게 내게 오히려 낫지 않나? 오케이, 잡코리아는 직원 모집, 임원 모집이고 알바 모집은 어디서 광고하지? 알바몬. 들어 본 거 같다. 거길 뒤져보자.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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