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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같은 삶 Mar 08. 2020

첨밀밀, '모든 형태의 사랑 이야기'

대사도, 스토리도 나오기 전, 영화를 여는 어떤 시퀀스 하나만으로 벌써 좋아지는 영화가 있다. 최근 '결혼 이야기'의 결혼 생활에 대한 플랙시백 시퀀스가 그랬고, '첨밀밀'이 그랬다.


흑백으로 시작된 기차 시퀀스에 이어 처음 택시를 탄 이소군(여명 役)의 시야에서 택시 앞 창에 펼쳐진 홍콩의 쨍한 컬러와 이미지들. 그 첫 장면부터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좋았던 건 그 이미지가 불러온 향수 때문일까, 그 시각적 강렬함 때문일까.

나는 남녀가 우연히 사랑에 빠지고 위기를 극복해 결국 사랑이 결실을 맺는 과정을 그린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극화된 우연의 순간은 대체로 공감하기 쉽지 않고, 사랑에 '결실'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그 속성 때문에 늘, 불안한 상태로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멜로 영화는 주로 연인들의 감정이 변해가는 과정과 그것에 대처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섬세하게 다룬 영화다. ('봄날은 간다', '블루 발렌타인', '우리도 사랑일까', '레볼루셔너리 로드' '결혼 이야기'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첨밀밀에서 이소군과 이요(장만옥 役)가 처음 맥도날드에서 만나서 서로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는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있을까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이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사랑에 빠졌던 사람들이 10년간 엇갈리고 여러 위기를 거쳐 결국은 서로 만나게 됐다는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결함이 있는 인간들이 향유하는 여러 형태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모든 게 불완전했던 젊은 날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사랑 이야기(이소군-이요), 육체적 욕망으로 시작했다가 진심으로 끝난 사랑 이야기(백인 강사-양배추), 상대를 웃게 만들고 싶어하는, 그리고 그 따뜻함에 응답하는 사랑 이야기(파오형-이요), 잠깐의 추억을 기름 삼아 평생을 불태우는 사랑이야기(로지-윌리엄 홀든), 아마도 극중에선 생략됐을 어린 시절 첫사랑 이야기(이소군-소정).


이 영화는 이소군과 이요의 사랑 이야기가 파오형과 이요의 사랑 이야기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다. 어떤 이야기가 특히 뜨겁다기보단 모든 이야기가 뭉근했다. 다른 모든 일에서 그렇듯 인간은 사랑을 하면서 끊임없이 실수 하고,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후회 하고, 그러면서도 다시 또 사랑을 하고, 치유 받고, 과거를 향수하며 살아 간다. 영화 속 사랑 이야기가 환기하는 갖가지 감정들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 여러 번 멈췄다 봐야 했다.

이 영화가 좋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극 중 모든 인물이 감독의 시선에서 소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비중은 이소군과 이요가 압도적이었지만 모든 인물에게 연민이 느껴지게 연출됐다. 대수롭지 않은 대사와 아무렇지 않은 표정 위로 순간 순간 슬픔과 상처를 눈빛으로 표현한 이요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의였지만 홍콩에 발 딛고 상처를 극복하며 살아갈 소정의 번외 이야기도, 파오형과 이요가 연인이 되기까지의 시간도, 태국으로 돌아간 양배추의 남은 생도, 로지와 윌리엄의 바로 그 하루도, 자꾸만 궁금해하고 생각하고 곱씹게 된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나의 기억들도 부지불식간 끄집어 내게 된다.


첨밀밀은 영화 속 두 연인이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사랑 이야기가 되었고, 곧 나약하고 불완전했던 나의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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