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이었고,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인실은 거실 창문을 열어둔 채 그 앞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낮부터 마셨던 싸구려 커피. 그천오백 원짜리는 다 식어 빠져서 애매한 쓴맛을 냈지만 인실은 커피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한 번도 카페인 때문에 잠을 못 잤던 적이 없었다. 인실의 유일한 친구는 커피맛 사탕만 먹어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서 미칠 것 같다고도 했지만...
그 친구 생각을 하다 죽음을 생각했다.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그 애 집 작은 방에서 인형 놀이를 하다 친구는 "근데 나 언니 있었었다?"라며 자기 언니 얘길 꺼냈었다. 어린 인실은 아주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거짓말. 그러면 지금은 어딨어?"라고 했고, 그 앤 다시 "응, 백혈병 때문에 먼저 하늘에 갔댔어."라고 말했었다.
그 얘길 잊고 지내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 그러니까 한참이 지나 어른이 되고 나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애 목소리는 마치... 자기가 언닐 죽인 것인 마냥 어딘가 주눅이 들어있거나 아니면 고해성사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었다. 아무튼 인실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죽음을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까맣고 눅눅한 밤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과주스 냄새가 났다. 동그란 유리병에 든 비싼 사과주스 향은 아니고, 어딘가 쿰쿰하고 매스꺼운 데가 있는 사과주스 '냄새'였다. 인실은 창문 밖에서 나는 냄샌가 싶어 방충망을 제끼고 코를 킁킁대 보았지만 바깥은 아니었다. 이번엔 식어빠진 커피에 코를 박고 킁킁댔다. 거기도 아니었다.
사과주스 냄새는 기분 나쁘게 코에 들러붙었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렇다고 그 쿰쿰하고 매스꺼운 냄새의 농도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인실은 결국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양치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카페인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
다음 날, 인실은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살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다른 게 있다면 비 오던 날 밤에 맡았던 사과주스 냄새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편의점에 들려 2+1으로 팔고 있는 싸구려 사과주스를 사서 마셔도 보고, 마트에서 사 온 사과주스를 일부러 묵혀 두었다가 마시기도 했다. 그 쿰쿰한 냄새를 다시 맡고 싶다기 보단... 어딘가 편안했던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서.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인실은 다시 그 사과주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 날은 친구가 수면제를 잔뜩 삼켜버린 날이었다. 인실은 위 세척을 하고 병실에 누워있을 그 애를 떠올리며 '어쩌면 그 애는 자기 언니의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다시 쿰쿰하고 매스꺼운 데가 있는 사과주스 냄새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었다. 어딘가, 정말 어딘가 편안한 데가 있었고 그 뒤로 인실은 마음을 모아 집중하기만 하면 언제든 그 냄새를 상상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인실은 자주,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