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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Sep 26. 2020

이질감

2

    노인은 벌써 삼십 분째 한 곳에 앉아 있었다. 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노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어딘가로 빠르게 실어 날랐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노인의 머릿속은 까마득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청년을 붙잡고 도대체 거기가 어디인지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실 노인은 얼마 전 그의 아들에게 거기가 어디인지 이미 열 번이나 듣고 난 뒤였다. 아들은 처음에는 친절했다. 상냥했고, 나긋나긋했다. 아들에게는 인내심이 있었다. 그래, 인내심. 노인은 그 상냥하고 인내심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절망했다.


    창밖엔 뜨거운 볕이 아스팔트를 녹일 듯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여름. 그러나 노인이 앉은 곳은 에어컨 바람에 오싹했다. 노인은 참을 수 없는 이질감에 뒷목을 벅벅 긁었다. 거칠고 검은 피부는 붉은 손톱자국 조차 내지 못했다. 아, 미지근한 물 한 잔만 마시면 좋겠는데. 노인의 갈증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사십오 분이 지났다. 북적이던 공간의 공기가 차분해지고 나서야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상냥하고 인내심 어린 아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깊은 데에서 옅은 용기가 일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계 앞에 섰다. '주문하시려면 터치하세요.' 노인은 안경을 코 끝에 걸치고 화면에다 손가락을 댔다. 잘하셨어요. 이번엔 어디서 먹을지를 선택하세요. 그래, 나는 여기서 먹고 싶어. 밖은 너무 더워. '매장에서 식사' 터치.


    노인은 불고기 버거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화면 어디를 봐도 불고기는 없었다. 아, 기억해보자. 노인의 머릿속으로 아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엔 상냥하지 않다. 그러니까요, 아버지. 추천 메뉴 말고 여기 버거&세트 있지요? 이걸 누르시면 된다고요. 아 그래, 맞다. 저걸 누르고 나니 그제야 불고기란 말이 보인다. 저걸 터치. 그러고 나서 단품, 세트, 라지 세트...


    노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불고기 버거하고 물이 먹고 싶은데, 여긴 식당인데도 정수기 하나 없지 않은가. 나는 목이 마른데. 노인의 머릿속으로 다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예요. 아버지, 저거, 저거를 누르시면 된다고요. 저거? 저게 뭐였더라. 아들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 거친 목소리 앞에서 노인은 그보다 더 거친 목소리를 냈었다. 이 놈이 아버지 앞에서 성질을 내냐고. 니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게 됐냐고.


    노인 뒤로 줄을 섰던 청년들은 노인을 도울 생각이 없다. 그저 옆에 있는 기계로 줄을 바꿔 설뿐. 눈치를 주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노인은 어지러웠다.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생각이 났다. 아, 녹아내릴 것 같다. 누가 좀 도와줘요. 아니, 나 혼자 할 수 있다고! 아닙니다. 저 못해요. 나를 도와주세요. 나도 늦둥이 아들 녀석이 있는데, 걔가 다 알려줬었다고.



-



    "할아버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어린 점원이 노인 옆에 서서 웃으며 말을 건넨다. 아, 예, 예. 저 불고기 버거 주문 좀 해줘요. 노인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은 점원의 손이 빠르다. 화면이 너무 빨리 넘어가는 바람에 노인은 아들의 목소리를 복기해볼 틈이 없다.


    "여기 카드 받으시고요. 앉아 계시면 제가 자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



    쟁반 위에 놓인 불고기 버거, 그 옆엔 물이 없었다. 미지근한 물.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것처럼 무섭게 떨어지는 볕과 이가 떨리도록 추운 바람을 쏟아내는 에어컨. 그 이질감. 노인에겐 미지근한 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물은 없었다. 노인은 포장을 벗기고, 우걱대며 햄버거를 먹는다. 그는 오늘도 배우지 못한다. 아들은 화가 났고, 점원은 친절했으므로.


    부숴진 노인은 누구의 배웅도 없이 식당을 나선다.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노인은 갈증을 느낀다.



_단편, 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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