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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초 Jan 15. 2021

타인이 책임지지 않는 나의 선택

집요한 나의 꿈 나의 사명





나는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미워했다. 세계 불평등의 원인이 신자유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약한 국가를 약탈한다는 경제학서들을 읽고 공부하면서 자본주의는 아주 나쁜 시스템이라고 치부하기 바빴다. 자본자들은 계속 돈을 버는 시스템 약자와 약한 국가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에 무릎을 꿇고 불행하는 삶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개발 정책을 만들고 연구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폐해를 보는 이들을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싶었다. 단순하게 UN 입성을 꿈꾸던 젊은 아이는 더욱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공부를 마친 나는 영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갓 석사를 졸업한 외국인이 영국에서 개발정책과 관련된 일의 기회를 잡는 것은 로또 당첨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세계의 불평등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나의 현실은 당장 살고 있는 렌트비를 벌어야 했다. 그래 '제대로 취업을 할 때까지 만이야'라고 생각하고 영국 런던 다운타운 한인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번역일을 하면서 매일 구직 생활을 했다. 2009년 당시 글로벌 리세션으로 경제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나와 같이 공부를 했던 영국친구들 역시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유럽 친구들은 다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세계 빈곤 문제보다 더 시급 한 건 나의 생존문제였다. 


이미 대학원 등록금을 내기 위한 빚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와 번역일로는 빚을 갚거나 현재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엔 약자에 대한 생각이 늘 있었으나 하늘이 나에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는 것 같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매일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는 나에게 당시 유행하던 스와인플루에 걸려서 일주일이 넘게 혼자 방에서 아파야 만 했다. 그때는 병원을 가볼 힘도 에너지도 없었다. 영국교회에서 만난 한국 언니가 작고 초라한 내 방으로 병문안을 왔다. 그 언니는 호주에서 컨설팅회사에서 일을 하고 영국 온 지 한 달 만에 너무도 쉽게 이직에 성공한 언니였다. 


내가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구직 활동을 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언니는 한국에서 일 경력을 쌓고 언제든 다시 나오면 된다고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매일 나의 꿈을 이루겠다고 내 건강을 못 챙기는 모습을 본 나에게 매우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조언이었다. 버스비가 아까워서 40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 다녔다. 밥도 잘 못 먹고 매일 걸으니 나는 점점 말라갔고 자신감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젠 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제발 취직만 돼라 하는 마음으로 이력서를 아무 곳이나 뿌려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영국에서 남고 싶은 이유를 잊은 채 이젠 매달 월급이 나오는 번듯한 직장을 갖고 싶었다. 높은 학력을 가지면 쉽게 취직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렇다 할 관련한 직장 경력이 없고 공부만 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경쟁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영국 내 한국기업을 기웃거렸다. 자본주의를 미워했던 내가 대기업이라니... 한국 모 대기업 영국법인 면접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내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고 왜 공부를 하고 무슨 직업을 갖고 싶었는지 초심을 떠올렸다. 


바로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내가 영국에서 취직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정책적으로 자본주의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목표를 되뇌었다.  나에게 병문안을 와서 조언을 해준 언니의 말이 기억이 났다. 그렇게 제일 싼 비행기 티켓 중국 항공을 끊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패잔병이 된 느낌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으로 불평등을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리해서 빚을 내어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개발정책일을 하고야 말리라 선언하고 떠났던 나는 1년 반 만에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 줄었고 갚아야 할 대출금만 잔뜩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말라도 너무 마른 나의 모습을 보고 엄마가 꽤나 마음 아파하셨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당시 대학생인 친동생 원룸에 얹혀살면서 국책연구원직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경제정책연구소에 들어가서 경험을 쌓고 다시 밖으로 나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모집공고를 뜬 것을 보고 지원했다. 놀랍게도 1달 만에 바로 취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경제 관련 국책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명함이 생기고 내 자리가 생기고 너무 신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경험도 잠시 내가 상상했던 정책연구과정은 매우 달랐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자료를 모으고 데이터를 취합해서 연구담당 박사님께 넘겨드리는 일이었다. 매일 숫자만 보면서 데이터를 모으고 전달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지식노동자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지식노동자의 대가인 월급으로 대학원 학비를 전부 청산했고 자신감도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해결하지 않은 꿈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이대로 연구직에 몸담고 있을 것인가, 개발 현장 책임자로 일할 것인가. 세계 불평등을 해결에 기하고 싶다는 싶은 사명은 나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고 움직이게 했다. 


이 사명을 품고 나는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삶을 선택했다. 모든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누군가 등 떠밀어서 연구원이되라고 한 적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나에게 유학을 권하지도 않았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세계 불평등 해소를 위해 일해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아래 그저 손 쓸 수 없이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늘 쓰였다. 모두가 이 시스템은 당연해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해라고 프레임을 입히고 받아들이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싫었다. 구걸하는 어린아이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모두가 무관심한 사실이 정말이지 끔찍했다. 약자를 위한 기부나 봉사는 당연한데 마치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치켜세우는 것도 싫었다. 


 주어진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을 같이 고민하고 찾는 이들이 많기를 바랐다. 나도 일원이 되어 정책적으로 기여를 하든 현장에서 기여를 하든 기부로 기여를 하든 어떤 방식이든 참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종종 질문을 받는다. 제가 지금 있는 곳에 계속 일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내가 이선택을 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질문들을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물론 고민하는 과정에서 조언을 구하고 참고를 하는 과정이겠지만 결국 모든 결정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 주인공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모두 같은 길을 갈 필요가 없고 우리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들을 의심하고 질문하면서 의문을 갖기를 감히 말하고 싶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가난해졌나? 모두에게 정말 동등한 기회가 주는 것인 걸까? 돕기만 하면 자립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가? 


 집요하게 경제적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여를 하고 싶은 생각으로 나는 지금도 고민하며  실천하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 덕분에 같은 비전을 품는 남편도 만나게 되고 이젠 혼자만 꿈꾸는 삶이 아니라 같이 비전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혜택들이 누군가의 상상력에서 나왔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비행기, 스마트폰, 콘텐츠를 즐기는 유튜브,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상상력으로 실현된 결과물이다. 나는 그래서 분명하게 상상한다. 많은 이들이 나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 스치듯 생각했던 것 나눔의 가치, 불평등, 경제적 사회적 약자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의 고민에서 실행으로 옮겨진다면 이 글의 역할은 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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