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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Apr 26. 2024

"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독일 청년과 영국 의사, 그들을 이어준 기적의 조혈모세포 이식

세상에는 선과 악,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 악행을 폭로하고 비난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오늘은 악당 없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타적인 결정이 미치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영향에 대해 전하고 싶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 시련의 순간에 우리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희망의 불빛을 밝혀주는 손길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몇 년 전,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인공은 영국인 의사 닉 엠블턴 박사였다. 그는 희귀 혈액암 진단을 받고 조혈모세포 이식만이 생존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20여 년간 잉글랜드 뉴캐슬 지역의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아기들의 생명을 살려냈던 그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유언장도 썼어요. 가족들에게 철저히 준비시켰죠."


엠블턴 박사의 말에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특히 아이들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아빠 없이 살게 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조혈모세포 이식이었다. 조혈모세포(Hemopoietic stem cell)는 정상인의 혈액 중 약 1% 정도에 해당되며 모든 혈액세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원조가 되는 어머니 세포를 말한다. 조혈모세포이식은 백혈병과 같이 세포분화 과정에서 이상이 생긴 경우나 재생불량성빈혈과 같이 조혈모세포의 숫자가 줄어들어 이상이 오는 경우에 이들 질환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다. 


다만, 기증자와 조직접합성 검사가 일치해야만 손상된 혈액 세포를 건강한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거부 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백혈병 및 조혈모세포 이식 분야 관련한 영국 자선단체 '앤서니 놀란'의 관계자 샬롯 휴즈는 "보통 영국에서 먼저 일치자를 찾지만, 없으면 전 세계로 범위를 넓힙니다. 어디서든 일치자가 나타날 수 있죠." 모두가 엠블턴 박사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기적은 일어났다. 독일 동부 드레스덴 인근 캠니츠에 사는 24세 청년 베르너가 기증자로 나섰던 것이다. 


마리우스 베르너, ⓒBBC


10대 후반부터 기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두었던 그는 BBC의 도움으로 엠블턴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프리먼 병원'에서 서로 마주한 두 사람, 감격의 포옹을 나누는 순간 누구도 숨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엠블턴 박사와 직접 만나 포옹한 베르너는 “정말 벅차다. 몸이 떨린다”라고 말했다. 엠블턴 박사는 베르너에게 말을 꺼냈다.


"당신 덕분에 암세포가 모두 사라졌어요. 제 혈액세포가 전부 당신 것으로 바뀌었죠.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거예요. 아이들이 아빠 없이 살아야 했겠죠. 정말 고맙습니다."


엠블턴 박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북받치는 감정에 베르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이식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눈물만 났어요. 차를 세우고 한참을 울었죠."


베르너는 자신의 아픈 과거도 꺼내놓았다.


"13살 때부터 정신적 문제로 고통받았어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죠. 그런데 이제는 제가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해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엠블턴 박사와 베르너, 이제 그들은 혈관에 같은 피가 흐르는 '피를 나눈 형제'가 되었다. 두 사람은 평생 이 감동을 잊지 않기로 약속했다.


마리우스 베르너(왼쪽)와 닉 엠블턴(오른쪽), ⓒ


타인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그중에서도 조혈모세포 기증은 정말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는 2022년 기준으로 402,995명의 기증 희망자가 등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혈모세포가 일치할 확률은 약 이만 분의 일에 불과하다. 그래서 조혈모세포를 등록하고 기증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유전적 다양성도 높아지며 완치 확률도 그만큼 높아진다.


BBC에 소개된 엠블턴 박사와 베르너의 사연은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한다. 베르너의 행동은 단순히 한 생명을 구제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선택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 연결고리를 이타심으로 채울 수 있다는 깨달음이 우리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만드는 핵심 요소일 것이다.


나 역시 최근 기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젊고 건강할 때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변화는 사소한 관심과 배려에서 시작한다. 작은 실천이 타인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과 타인과 함께하는 삶.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종착점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나는 후자의 길을 걸어보고자 한다. 이제 그 첫걸음을 떼었고, 앞으로도 작은 실천을 이어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삶을 보다 가치 있게 만드는 길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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