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돈이 되는 시대: 마케팅의 윤리를 되묻는다
한국소비자원의 '2023 소비자 피해구제 연보'는 현대 마케팅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소비자 피해구제 신청 건수가 증가 추세를 보이는 가운데, 특히 금융투자 상품과 교육 서비스 분야에서 '허위·과장 광고'로 인한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 이는 경제적 성공과 자기계발에 대한 현대인들의 불안 심리가 마케팅의 주요 표적이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24년 1분기에 발표한 전자상거래 분야 모니터링 결과는 더욱 구체적인 실태를 보여준다. 인플루언서를 활용한 SNS 마케팅의 허위·과장 광고가 증가하는 추세이며, 특히 '한정 판매', '마감 임박' 등 소비자의 즉각적인 구매를 유도하는 조급성 마케팅이 주요 문제로 지적됐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의 '2022 인터넷 이용실태조사'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위험을 경고한다. 소셜미디어 이용자의 54.3%가 광고 노출에 피로감을 느끼며, 특히 20대의 경우 이 비율이 62.8%에 달했다. 이 수치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20대조차 피로감을 호소한다는 점은 현재 온라인 광고의 강도가 이미 수용 가능한 한계를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둘째, 광고 피로도가 높은 집단일수록 불안 마케팅에 더 취약하다는 점이다. 과도한 광고 노출로 인한 피로감은 결국 비교 분석 능력을 저하시키고, 감정적 소구에 더 쉽게 반응하게 만든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최근 심의 결과는 이러한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허위·과장 광고 심의 건수가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재테크, 다이어트, 교육 분야에서 불안 조장 콘텐츠가 주로 발견되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2년 금융소비자 보호 실태평가' 결과는 불안 마케팅의 실제 피해 규모를 보여준다. 은행과 보험사의 불완전판매 건수가 전년 대비 증가했는데, 특히 주목할 점은 노후 불안을 자극한 연금보험 상품의 민원이다. 이들 상품의 해지율이 일반 보험 상품보다 높게 나타났다는 사실은 불안 마케팅이 결국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을 증명한다. 소비자는 금전적 손실을, 기업은 브랜드 신뢰도 하락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산한 2021년 과장 광고 관련 소비자 피해액 1,000억 원은 빙산의 일각이다. 이는 공식적으로 신고된 피해액만을 집계한 것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실제 피해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첫째, 대부분의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더라도 공식적인 신고 절차를 밟지 않는다는 점, 둘째, 금전적으로 환산할 수 없는 심리적 불안과 스트레스는 집계에서 제외됐다는 점이다.
영국의 유니레버가 2022년 연차보고서에서 발표한 내용은 윤리적 마케팅의 성공 가능성을 입증한다. 지속가능한 생활 계획(USLP) 브랜드들이 다른 브랜드보다 50% 빠른 성장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수치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이는 단기적 실험이 아닌 5년 이상의 장기 추적 결과라는 점에서 신뢰성이 높다.
둘째, 글로벌 불황기에도 이러한 성장세가 유지됐다는 점에서 가치 중심 마케팅의 회복탄력성을 보여준다.
셋째, 이러한 성과가 다양한 제품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특정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웃도어 브랜드 아크테릭스(Arc'teryx)의 'ReBird' 프로그램은 가치 소비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2019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더 비싸지만, 더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이라는 메시지로 프리미엄 가격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뤘다. 수선과 재활용을 제품의 핵심 가치로 내세운 결과, 2021년 기준 전년 대비 글로벌 매출 39% 증가를 기록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제품 수선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의 재구매율이 일반 고객 대비 2.1배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불안 자극이 아닌 제품의 본질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강조하는 마케팅이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23년 개정한 '중요한 표시·광고 고시'의 의미는 작지 않다. 매출액의 2%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순한 처벌 강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이는 불안 마케팅을 더 이상 단순한 영업 전략이 아닌 중대한 소비자 권익 침해로 보기 시작했다는 인식의 전환을 의미한다. 둘째, 과징금을 매출액 연동으로 설정한 것은 대기업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반영한다.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의 ESG 광고심의 기준 신설(2022년)은 업계의 자발적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기준이 단순히 허위·과장 광고를 규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는 점이다. 이는 마케팅 분야에서 부정적 요소의 제거를 넘어 긍정적 가치의 창출을 지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을 알린다.
실제 데이터를 종합해보면, 불안 마케팅의 문제점은 명확하다. 단기적 매출 증가를 위해 소비자의 불안을 자극하는 전략은 장기적으로 기업의 신뢰도를 훼손할 뿐만 아니라, 측정 가능한 경제적 손실도 야기한다. 반면, 가치 중심 마케팅은 단순한 윤리적 선택을 넘어 실질적인 경영 전략이 될 수 있음이 여러 성공 사례를 통해 입증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강화되는 규제, 높아지는 소비자 의식, 그리고 빠르게 전파되는 부정적 정보는 불안 마케팅의 지속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한다. 제품은 팔되, 공포는 팔지 말자. 이제 이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닌, 데이터로 입증된 미래 마케팅의 필수 원칙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