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의 '대한민국 남자 리포트'
한 지인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 1년 전, 그는 아들의 친구들과 일박 여행을 다녀왔다. 그 후로도 아이들을 헬스장에 데리고 다니며 운동을 가르치고, 종종 함께 식사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미국에서 보낸 내 유년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늘 아버지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나고 자라, 한국에서만 살아온 그가 내가 꿈꾸던 그런 아버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내 주변에서 아들 친구들에게 이토록 진심 어린 지지를 받는 어른은 그가 유일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봄날, 그가 책을 쓰겠다고 했을 때 유독 관심이 갔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삶의 방식을 책으로 써보려 합니다."
그는 하루하루를 촘촘히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사 일에 매진하고, 주말마다 외부 강연과 자기 계발로 시간을 채우는 그에게 책 출간은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다.
시기도 좋지 않았다. 한때 출판계를 이끌었던 에세이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에서 독자들은 실용적인 자기 계발서와 재테크 도서를 찾고 있었다. 거기에 메이저 출판사가 아닌 소규모 출판사와 함께하겠다는 선택은, 더욱 큰 모험처럼 느껴졌다.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내 우려와 달리, 그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매주 주말 30분씩 꾸준히 원고를 써내려갔고, 마침내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100위권에 진입하는 놀라운 성과도 있었지만, 더 감동적인 순간이 있었다. 아들의 친구들이 먼저 연락해 책 출간을 축하하면서, 친구인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해왔다는 것이다.
가장 놀라웠던 건 아버지에게서 배운 삶의 지혜를 자신의 경험으로 녹여낸 깊이였다. 출판계의 현실도, 소규모 출판사의 한계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무게 앞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출간 전, 그가 보내온 원고를 처음 펼쳤던 저녁이 떠오른다. 노트북 화면에서 한 문장이 유독 선명하게 다가왔다.
"나다워도 괜찮다."
이 담백한 고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마치 오랜 전우가 보낸 편지를 읽는 듯한 묘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에세이가 우아한 문체나 세련된 표현으로 감정을 포장하는 것과 달리, 그의 글은 군대 내무반에서 나누는 깊은 대화 같았다. 꾸밈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편안함이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졌다.
원고를 읽어 내려가며 자연스레 그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었다. 여느 감성 에세이와는 달랐다. 한 남자가 동료들에게 보내는 인생의 편지 같았다. 때로는 서툴고 때로는 직설적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생각은 단단했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주었다. 말씀은 적으셨지만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시던 아버지, 매일 이른 아침 출근하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그의 글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이 책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바로 이런 그만의 결이 있어서일 것이다. 화려한 문체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담백한 태도가 더 깊이 스며들었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발견한 것처럼, 이 책은 우리 각자의 기억 속에 잠든 이야기들을 고요히 깨워주었다.
이 책은 단순한 아버지의 조언집을 넘어선다. 저자는 아버지에게 배운 '남자다움'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 체득해 가는 여정을 담았다. 직장에서 상사를 대하는 법, 아내와의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 후배들을 이끄는 자세까지. 그 모든 순간에 아버지의 가르침이 어떻게 살아 움직였는지를 보여준다.
"너의 삶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라."
처음에는 평범한 격려로 들리던 아버지의 이 말씀이, 세월이 흐르며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일과 삶의 갈림길에서 이런 아버지의 말씀들을 되새기며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갔다.
책에는 그의 성장 과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대학 시절 첫 사업의 성공에서 느낀 희열, 이어진 실패의 쓴맛, 그리고 직장에서 마주한 다양한 도전들까지. 특히 직장 생활의 고충이 인상적이다. '동료애'를 강조하며 휴일 모임을 강요하는 상사, 실력은 부족하면서 승진욕만 앞서는 상사, 일은 잘하지만 인간성이 의심되는 상사까지. 이런 난관들 속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책은 깊이를 더한다. 대한민국의 직장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누군가의 상사이자 후배로 살아가며 마주치는 현실적인 고민들. 그 속에서 저자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남자다움'을 새롭게 해석해 간다.
지금도 그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다. 때로는 리더로서, 때로는 동료로서, 그렇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며, 우리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나침반이 되리라는 희망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