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온 몸으로 맞이해 봤니?
작년 여름,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우산을 두고 우비만 입고 걸어가는 첫 걷기 여행이었다. 내가 이렇게 비를 맞아본게 얼마만이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어린시절, 비가 내리면 기다렸다는 듯 신발장으로 달려가 노란 장화를 꺼내들었다. 반가운 비를 맞이하는 전투적 자세라고 할까. 마당에서 빗물이 남긴 물웅덩이를 부러 찾아가 첨벙첨벙 헤집어 놓는다. 왠지 모를 짜릿함이 밀려온다.
비가 한창 쏟아지고 난 뒤의 공기는 햇빛 쨍한 날의 그것과는 또다른 싱그러움이 있다. 물을 머금은 자연의 생기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생명의 기운이 코 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실려 널리 널리 퍼져 나간다. 나도 설레기 시작한다.
언제부터 비가 피해야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삶의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비는 더 이상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일주일 기상예보에 비가 오는 날이라도 있으면 자동적으로 ‘이 날은 왠만하면 밖에 나가지 말아야겠군. 비오는 날은 집에 있는게 최고지. 나가봤자 귀찮은 일만 생길 거야.’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성인이 된 나에게 비는 더 이상 신기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내 일상을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한동안 자신을 외면했던 나에게 섭섭했을법도 한데, 정작 비는 언제 그런일이 있었냐는 듯, 이틀 내내 둘레길을 함께 걸어주는 말벗이 되어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였다. 20년이 지난 세월동안 묵혀둔 이야기를 하나씩 꺼냈다. 똑똑, 우비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살짝 미끌려서 내는 빗소리, 앞서 내린 빗방울과 합쳐져 내는 빗소리….. 다양한 비의 이야기가 내 귀를 가득 채웠다.
빗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우산을 들어야 하는 손이 없으니 양손이 모두 자유로웠다. 재빨리 두손으로 하늘에서 곧바로 떨어지는 빗물을 고이 받아보았다. 손바닥안에서 댕굴거리는 비의 촉감을 느껴본다. 잊었던 옛 친구를 다시 만난날이니 이럴땐 춤이 빠질 수 없지. 양 팔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하늘을 향해 휘휘 흔들어 춤사위의 몸짓을 해본다.
그렇다. 나는 비에 젖은 옷이야 말리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그동안 무엇이 나를 비와 멀어지게 만들었는가. 사실 비가 아니라, 비를 맞으면 따라올 무언의 시선때문은 아니었는지. 비가 어깨에 살짝이라도 닿을라치면, 젖은 내 모습을 보고 나를 판단할 눈빛을 마주하는게 껄끄러웠다. 그럴수록 안그래도 작은 우산속에 몸을 욱여넣었으니 결국 비가 아닌 내가 만든 불편함이었다. 내 생각이 짧아 스스로 서있지를 못하니 타인이 내쉰 옅은 콧바람에도 칼팡질팡 흔들렸다. 매주 월요일, 이제는 기상예보를 볼때 맑은 날보다 비오는 날이 언제인지 먼저 확인한다. 비도 내가 반겨야 할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