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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멜트 May 22. 2023

자본주의를 이해한다는 것

아티스트와 프리랜서에게 '돈'이란?

본격적으로 프리랜서로 활동한 지 햇수로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꼽아보자면, 돈에 대한 생각이다. 수익이나 저축, 투자 같은 이야기는 아니고 더 근본적인, 자본주의에서의 돈에 대한 인식 말이다.


나는 소위 뮤지션, 아티스트라는 정체성으로 2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아티스트는 길던 짧던 수입이 없는 시기을 보내게 된다. 스스로 생각하는 작품의 가치와 실제 세상에서 매겨지는 가치가 불일치하는 시기. 나는 작품에 대한 자부심, 동료들의 인정 덕분에 그 시기를 꽤 오래 견뎠다. 그리고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시기를 절대 견디지 않을 것이다.


 잠시 딴 길로 새어보자면, 우리 집은 확실히 두말할 것 없이 가난한 편이다. 한겨울에 보일러가 끊긴다던가 학비나 급식비가 밀리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우울한 감성팔이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금전감각이나 돈에 대한 인식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그 낙담의 골짜기를 유독 오래 견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체득한 가난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어쨌든 그 시기를 견디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기 합리화뿐이다. '성공한 사람은 모두 이런 시기를 겪었고 나는 잘하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 '나는 잘하고 있다.'라는 말은 전혀 문제가 없다. 지금도 매일 자신에게 되뇌는 말이다. 그러나 그때 나의 무의식이 지금과 참 많이 달랐다는 건 이제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이런저런 전문용어나 사전적 정의는 집어치우고, 내가 이해한 대로 자본주의를 표현하자면 바로 이렇다.

 '나의 가치를 다른 사람의 가치와 맞교환하는 것.'

베푸는 가치의 크기에 비례해 받는 돈의 양도 늘어난다. 돈은 가치를 숫자로 표기해 주는 일종의 단위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미 무의식적으로 체득해 살아간다. 나를 도와준 친구에게 밥이라도 사고, 흔쾌히 누군가를 돕더라도 괜히 보상을 바란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말만큼 자본주의를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이것은 말 그대로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에 속해있는 우리의 무의식 깊숙이 자본주의는 새겨져 있다. 이는 '돈'이 우리 무의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시 1)

누군가 당신에게 찾아와 '윙크를 한 번 해줄 때마다 10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할 것이고, 눈에 경련이 일어날 때까지 윙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매일 그를 찾아가 윙크를 하는 '일'을 할 것이다. 어느새 당신에게 윙크는 돈을 벌어다 주는 일이 되고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윙크를 해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예시 2)

반대로 당신에게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8시간씩 육체노동을 시키고 심지어 철야 작업도 시킨다고 가정해 보자. 그에 대한 값은 고작 5천 원이다. 모두 이 일을 하기 싫어할 것이고, 억지로 하게 된들 이를 시간낭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명예롭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해도.


둘 다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요지는, 우리는 일과 대가가 비례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이다. 일이 어럽고, 힘들고, 전문적이고, 희소할수록 많은 돈을 받는다. 반대도 똑같이 성립한다. 우리가 돈이 생겨 기쁜 이유는 그 돈이 결국 나의 가치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일을 하는데 돈을 못 받는다면 그 일은 시간낭비가 된다. 물론 무의식이 멋대로 그렇게 판단한다는 말이다. 내가 음악을 할 때도 이런 일이 무의식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잘하고 있다'라는 말은 무의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시간낭비해도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처음에 언급했듯, 누구나 처음엔 낙담의 골짜기를 거친다. 매출이던, 단가던, 학습이던 말이다. 그게 정상이다. 본질적으로 그 시기는 가치가 불균형한 시기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너무 길어지면 그 불균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아도 괜찮아'라고. 이것 자체도 문제였지만 나에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부조리를 계속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꿈이라는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시도도 변화도 없이 언젠가 꿈이 이뤄지리라 믿으며 어제를 반복한다. 지금의 부조리는 언젠가 이뤄질 꿈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꿈으로 향하는 중간 단계(step)는 고려하지 않는다. 마치 매주 로또를 사는 감각이다. 현실적으로 매주 로또를 산다고 당첨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저 사는 거다. 로또를 사듯 매일 음악작업을 했다. 0.0001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당첨이 되길 바라며. 한편으로는 절대 당첨되지 않으리라는 걸 애써 외면하며.


어느덧 나는 나를 위한 음악,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했다. 작은 시장에서 큰돈을 벌 수는 없다. 심지어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대중성을 피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지 않았다. 세상이 나를 몰라본다면 애초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면 될 테니. 나의 독특한 음악세계는 한편으로, 도저히 못 이룰 큰 꿈으로부터 도망쳐 도착한 나만의 낙원이었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취미였던 영상을 공부해 판매 페이지를 만들었다. 6개월 만에야 첫 의뢰가 들어왔다.  첫 정산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세상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평형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로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닌 타인을 위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상이라는 매체 특성상 시청자가 꼭 필요한 데다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이런 생각을 자리 잡게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클라이언트던 시청자던 타인을 위한 영상을 만들어주니 수입이 생겼다. 그들이 생각하는 나의 가치만큼. 소속사도, 유통사도, 음원사이트도 필요 없었다. 나와 클라이언트 간 이루어지는 이런 직접적인 거래와 피드백은 나에게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더 많은 페이를 받기 위해서는 클라이언트에게 더 좋은 서비스와 영상을 만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줘야 했다. 실력은 곧 퀄리티로 이어졌다. 퀄리티는 곧 판매량으로 이어졌다. 판매량은 다시 실력으로, 가격상승으로 이어졌다. 드디어 내 작품과 세상의 가치가 평형을 이뤄가고 있었다.


로또를 사는 감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4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1달 만에 첫 정산금의 10배의 수익을 올렸다. 흐릿했던 단계(step)도 또렷해졌다. '내가 주는 가치를 키우고 양을 늘리는 방법'들을 쉼 없이 고민하고 또 시도하는 중이다. 이런 변화와 깨달음을 단순히 수익이 생겨서라고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 수익은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나의 무의식에 확신을 준 것이다. '이대로 해도 괜찮다. 내가 투자한 만큼 분명 돌아올 것이다'라고.




예전에는 스스로가 벌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의식은 그렇지 못했다. 문득, 탈북민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이 자본주의였다는 인터뷰를 보고 의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자본주의 시스템은 당연한 것이다. 무의식이 그에 적응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아티스트이건, 프리랜서이건, 심지어 직장인이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자극제는 '돈'이라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내가 제공하는 가치를 뜻한다. 부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가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반대로,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부자가 될 것이다.



덧붙여


자본주의는 부정적인 면도 많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지구상 어떤 시스템도 완벽하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의 시스템이 이미 그렇게 이루어져 있고 우리의 무의식은 그에 적응되어 있다. 그러니 솔직히 말하자면, 시스템의 옳고 그름에 대한 담론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시스템'을 인지하는 것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치라는 말 안에는 값(쓸모와 유용함을 수치화)이 표함 되어있다. 그리고 그 쓸모와 유용함은 모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은 없다. '아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라고 반박하고 싶다면, 틀렸다. 당신이 방금 가치를 매김으로서 가치가 생겼으니까. 거시적으로 모든 물질과 성질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그러니 그 역할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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