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입으로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착한 사람 없다.
오늘 나는 이사를 했다.
이사하기 전 집은 월셋집이었지만 어쨌든 내 이름으로 얻은 첫 번째 집이었다. 주변보다 저렴한 시세였고 저렴한만큼 집이 많이 낡았지만, 생에 처음 생긴 나만의 공간이었기에. 집의 상태 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방에 발매트조차 내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했던 전남편의 통제를 벗어나 오롯이 나의 취향과 필요에 맞춘 물건들로 가득 채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집주인 할머니는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노인으로 1시간쯤 떨어진 시골에 사셨기 때문에, 부동산 중개인에게 집 계약에 관한 일을 거의 전적으로 맡기시는 것 같았다. 계약 당시에는 직접 부동산에 오셔서 계약을 하셨는데, 월세를 주면서도 임차인이 바뀔 때마다 집 상태 체크를 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집주인분 연세도 너무 연로하시고 집세도 시세 보다 저렴하게 내놓으셨기 때문에 딴에는 배려한다고 집에 생긴 자잘한 문제들은 집주인 분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 어두웠던 조명도 내가 사비로 직접 바꾸고 오래된 주방 호수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때도 부모님이 고쳐 주셨다. 엄마는 샤워기 헤드 하나를 바꿔 써도 집주인에게 바꿔 달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착한 것도 아니고, 집주인에게 내가 배려했다고 생색내고 싶은 것은 더더욱 아니였다. 엄마는 내가 돈을 우습게 봐서 그런 거라고 했다. 만원 이만 원이 얼마나 귀한지 알면 그렇게 내 돈을 쉽게 못쓸 거라고 했다. 어쩌면 그말도 맞는 말 같다.
어쨌든 정들었던 그 집에서 2년을 살고 집주인 분은 계약 연장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이사 2주 전에 집주인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내가 이사 가는 날 집을 체크하러 오신다는 것이었다. 본인 입으로 세입자 집을 체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세입자가 살던 집을 체크하신 적 없던 분이 왜 하필 내가 나갈 때 그것도 굳이 내가 이사하는 날 아침에 오시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례가 없어도 어찌 되었든 간에 이사 가는 집 상태를 체크하는 건 집주인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에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이혼한 이야기를 꺼내며 내가 불쌍해서 집을 싸게 준 것이라고 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예감은 좋지 않았고, 역시나 이사하는 날 내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부모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집주인이 왔다. 집주인은 내가 망가트리지 않은 부분까지 걸고 넘어지면서 나에게 원상 복구 시켜 놓으라고 말했다. 집주인이 말한 망가진 부분은 내가 이사 왔을 때부터 이미 그런 상태였다고 말했지만 집주인은 내가 하는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내가 하는 주장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나는 폭발했다.
집주인과 나 사이에 몇마디 고성이 오갔지만 공인중개사와 부모님이 오고 나서 금방 수습되었다. 아빠는 가만히 계셨고 엄마가 몇 마디 하자 집주인은 금방 꼬리를 내렸다. 나는 이혼녀라는 나의 처지에 약자라는 지위를 멋대로 부여하고 무소불위 권력자 처럼 구는 집주인의 행동게 나는 너무 기가 찼다. 차라리 우리 부모님의 말도 듣지 않는 불통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집주인이 혐오스럽진 않았을 것 같다.
서로 오가는 금전적인 계산 없이 보증금을 돌려 받기로 마무리 되자. 집주인은 나에게 자신은 좋은 사람이며, (이전에도 전화 통화할 때도 자신은 착한 사람이라고 몇번을 이야기 했다) 세상이 원래 이렇게 냉정하다고 그렇게 배려하면서 살지 말라고 친절하게 덕담까지 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왜 그사람의 조언을 새겨들어야 하나. 나는 원래 이렇게 태어났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배려 할 수 있는건 배려 하고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양보 할 수 있는건 양보 하면서 살아 갈 것이다. 나역시도 내가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말없는 양보와 배려를 받으며 살아 간다. 집주인 처럼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앞에서는 떵떵 거리고 강자한테는 빌빌 거리면서 그렇게 살진 않을 것이다. 심지어 약자라고 판단해서 등쳐먹을려고 했지만 그 마저도 실패한 진짜 호구는 집주인 아닌가.
이번 일에서 배울 것은 내가 을이라고 갑을 배려를 하지 말자가 아니라, 애초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망가진 부분은 미리 사진을 찍는다던지, 집을 고치더라도 집주인에게 물어보고 고친다던지 하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아 너무 속상해 하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