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날드가 그림자 사서로 일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이제 도서관에서 로날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단 한 권의 책도 로날드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책꽂이에 꽂히지 않았다. 그는 도서관에 있는 수 만권의 책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중에 반 너머는 읽어서 알았고, 나머지 반은 분류 작업을 통해 어떤 내용인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림자 사서님은 우리 도서관의 자랑이자 보물입니다.”
도서관장은 시찰을 나온 문화부 장관에게 차를 대접하며 말했다.
로날드를 사서로 추천한 장관은 이미 은퇴한 후였다. 그림자 사서에 대한 상찬을 듣는 이는 언젠가 로날드 집 초인종을 누르던 그 비서였다. 비서는 성실한 공직 생활 끝에 장관 자리에 올랐다. 그에게 있어 장관이란 직함은 평생의 공을 들여 획득한 아주 자랑스러운 이름이었다. 젊은 시절을 몽땅 일에 바치고 장관이 되기 위한 길을 조심조심 다져간 끝에 획득한 트로피가 지금의 자리였다. 당연히 그는 자부심과 우월감이 가득 찬 고급 공무원의 분위기를 풍겼다. 도서관장은 새 장관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장관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차를 홀짝 마셨다.
"처음 기대했던 것 이상이군요."
그는 장관이 된 후 얼마 안 있어 로날드를 떠올렸다. 은퇴한 선임 장관과 주고받은 안부 편지 덕분이었다. 은퇴한 장관은 로날드가 사서 일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말을 전해왔다.
“아! 맞다. 그 유령 같은 외톨이가 있었지.”
장관은 부랴부랴 도서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관장실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로날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관장님은 취임하신 후 한 번도 로날드 씨를 만나본 적이 없으시군요?”
장관은 그림자 사서가 도서관의 자랑이자 보물이라고 장담했던 관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서관 관장이 부랴부랴 설명을 시작했다.
“아, 예. 그게 그러니까 제가 직접 만날 수는 없지요. 잘 아시다시피 그분은 사람과 대면하는 일을 극도로 꺼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업무량이나 실적이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직원 보고서에 고스란히 들어있으니 알 수 있죠. 그러니 꼭 만나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는 거죠. 거기다 애초에 그림자 사서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사서직을 수락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관장의 말은 한 군데도 틀린 곳이 없었다. 하지만 거만한 장관은 자신의 힘을 엉뚱한 곳에서 시험하려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임 장관님께서 로날드 씨의 안부를 무척 궁금해하십니다. 제가 거동이 불편하신 장관님을 대신해 한번 보고 싶군요.”
관장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는 그림자 사서를 괜히 들쑤셔 사달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그림자 사서를 호출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20년 동안 관장이 네 명이나 바뀌었지만 모두 처음 규칙대로 로날드를 대했다.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림자 사서는 아무 문제없이 업무에 충실했고 어느덧 국립 도서관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새로 임명된 장관이 느닷없이 나타나 그림자 사서를 불러오라니, 관장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장관은 앞에 앉은 남자가 쭈뼛거리자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문화부 장관으로서 일개 사서 직원 하나 호명하지 못한다면 체면이 설 것 같지 않군요.”
관장은 이마에 솟는 비지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정 그러시다면 장관님, 로날드 사서를 이리로 불러오기보다는 장관님께서 직접 서가로 가셔서 만나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궁여지책으로 낸 제안이었다. 장관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궁리하다 곧 머리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제가 양보하지.”
장관은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젠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시간 로날드는 마침 원예와 정원 가꾸기 책장 앞에 있었다. 봄을 맞이해 꽃 가꾸기와 나무 기르기에 대한 책들을 전시할 계획이었다. 그는 엊그제 새로 들어온 신간과 대출이 많이 되는 책들, 원예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책들을 추려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특히 독자의 주목을 못 받고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지만 보석처럼 빛나는 책들이 로날드의 관심을 끌었다. 로날드는 '숨어있는 보석'이라는 제목으로 책 전시를 하기도 했다.
“내가 어두운 그늘 속에 산다고 봄 햇살의 찬란함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로날드는 언제나처럼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열심히 전시할 책을 가려냈다.
그때 갑자기 책장 사이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로날드 씨, 여전하시군요!”
로날드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처럼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가 쳐다본 쪽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로날드는 처음에 설마 나에게 거는 말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지난 20년 동안 그에게 말을 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로날드 씨라는 소리를 들었다. 로날드 씨라니, 그 이름조차 20년 만에 듣는 명칭이었다.
로날드는 목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로서는 주저앉지 않은 것만 해도 용한 일이었다. 장관은 로날드의 심정 따위는 아랑곳없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 뒤로 관장이 주춤거리며 따라왔다. 관장은 그림자 사서를 처음 맞닥뜨리는 셈이었지만 로날드는 관장의 취임식 날 먼발치서 본 기억이 있었다. 대신 장관은 얼굴이 낯설었다. 20년 전 성급한 말투로 다그치던 비서가 희끗희끗한 새치를 얹은 중년의 신사로 변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림자 사서는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