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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Oct 13. 2021

난 바람 든 무다

금요일 5교시! 여느 때 같으면 점심시간이 지난 도서관은 조용하다. 아이들이 밀려나간 뒤 도서관은 고요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악기수업을 하느라 바이올린 소리로 채워졌다. 삐뚤빼뚤한 글씨처럼 바이올린 소리도 구부러지고 흔들리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제멋대로였다. 감상할 수준의 음색은 아니어도 바이올린 소리가 꽤나 듣기 좋았다.


느릿느릿 퍼지는 소리를 따라 나도 하다 말았던 책 정리를 마저 하고 있었다. 책을 옆구리에 끼고 책 사이사이를 비집어 자리를 찾느라 찬찬히 책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책 한권과 눈이 마주쳤다. "한때 소중했던 것들" 오래도록 눈길이 머물렀다. 정리할 책을 들고 있었건만 손길이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정리할 책도 아니었고 찾던 책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꽤 지나도록 떠나질 못했다. 제목만 보고있다 겨우 책을 빼내어 들었다. 책장을 열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렸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때 내 일부였기 때문이며

나는 한때 그 사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눈자위가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뜨거운 것이 꽉 채워져 터질 듯했다. 찢어질 듯 아팠다. 무언가 몰려오는 게 느껴졌고 바이올린 소리만큼 가느다란 떨림도 느껴졌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뒤따라왔고 찢어지는 아픔이 뒤쫓아왔다. 기어이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거긴 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고 울 수 있는 때도 아니었다. 눈치 없는 울음은 자꾸 비집고 올라와 나를 곤란하게 했다. 울음을 뱉어낼 수 없는데 자꾸 치고 올라왔다. 나더러 어쩌라고 울음을 치켜붙이는지... 주저앉아 책장 뒤로 숨었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숨죽여 울었다.


파리하게 떨리는 게 내 울음인지 바이올린의 떨림인지 알 수 없게 한데 썩여 울려 퍼졌다. 여리면서도 깊은 소리가 내 뱃속처럼 울렁거렸다. 어머니가 가시고서 제법 시간이 지났건만 어머니 빈자리는 여전히 날 허전하게 했다. 어머니 보낸 빈자리가 허전하고 휑하기만 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한때 내게 속해 있던 것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과 같다.

마음의 일부가 찢어지는데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 아픈 거였구나. 내 마음이 찢어졌었구나. 그래서 가슴에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새로 바람이 숭숭 왔다 갔다 했구나. 그 바람들이 오고 갈 때마다 난 시렸고, 여전히 바람은 드나들고 있구나.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날 아프게 하는 구멍은 약을 바른다고 매워질 것도 아물어질 것도 아닐 듯했고 한동안 바람은 계속 드나들 거 같았다.


난 바람 든 무구나. 속에 숭숭 바람이 들었다.

바람 든 무는 천지 쓸모없다고 했다. 바람이 든 건 무얼 해도, 어찌 요리를 해도 맛이 없다고 했다. 퍼석퍼석한 것이 식감도 없기에 생으로 먹기는 더더욱 걸렀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런 내 속을 버릴까? 쓸모없다고 쓰레기통으로 쑤셔 던질까... 그러긴 싫었다. 내 속이고 내 살인데 그 아픈 속을 어찌 버려 아서 못 버리지. 육수라도 내자, 동강동강 썰어 뭇국물이라도 우려내자...


어머니가 가시고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시간이 가니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대신 속이 자꾸 아렸다. 어머니가 주신 밥으로 채우던 속이니 허한 게 당연하겠지. 뭔지 모르게 자꾸 아프고 뭔지 모를 것이 자꾸 내 속을 쑤셔댔다. 쑤셔대는 속으론 잠 들 수도 없었다. 스탠드 켠 어둑한 밤, 아무 기척 없이 앉은 게 여러 날이었고 부스럭 부스럭 옛 기억을 더듬다 뭐라도 걸려들면 그걸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무엇 때문에 그리 아픈지도 모른 채 앓았고 뭘로 달래야 될지 몰라 손도 대지 못했다.


이젠 알았다.

소중한 것이 한순간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 상처가 났고 생살이 뜯긴 자리가 아직도 아린 거였다.

소중한 것들은 정말 한때구나

지난날 별것 아닌 것들은 별거였구나

찬 바람이 불어야만 추운 건 아니구나...


가을 무가 맛들어가는 지금

난 바람든 무가 되어 이 가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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