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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Nov 17. 2021

갈치찌개 한 숟가락에 헤벌쭉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던 날이었다. 오슬오슬 우산 든 손도 차가웠다. 집으로 가던 길, 어느 부엌에서 새어 나온 기름 냄새가 고소했다. 부추전인가? 파전인가? 김치전인가? 혼자 생각만 해보았다. 이런 비 오는 날은 파전 한입 정도는 속으로 미끄덩 넘겨줘야 빗소리가 잦아들건만. 그날은 전 냄새가 날 달래주지 못했다. 내 속은 다른 걸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칼칼한 냄새가 풍겼다. 입맛이 돌았다. '무슨 냄새지? 맡아본 익숙한 냄새인데...' 코가 연신 킁킁거렸다. 냄새의 정체가 알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맞다! 갈치 찌게' 매콤하니 달큰한 양념 냄새가 코를 들랑거렸다. 그때부터 갈치찌개가 사무치게 먹고 싶어 졌다. 다른 것 말고 갈치 찌개가 먹고 싶었다. 둘째를 가진 때라 먹고 싶은걸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갈치 찌개를 꼭 먹어야 하는데... 하얀 밥 위에 빨갛게 양념국물 적신 갈치 살과 물컹하니 양념 밴 무를 올려먹으면 얼마나 맛날까?'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지금 같으면야 당장 마트로 달려가 갈치를 사 와선 보글보글 조리겠지만 그땐 새댁일 때라 갈치 찌개를 해 본적도 할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생선이라곤 굽는 게 고작이었고 노릇하니 바싹 구워 먹는 갈치구이가 다였다. 양념도 만들 줄 모르던 내가 자글자글 갈치 찌개를 끓이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행여 잘못 끓이면 비릴 것이고 그 맛없는 찌개는 누가 먹을 것이며 아까운 갈치는 어찌할까 싶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쌀쌀한 기운이 도는 날엔 구이보다야 찌개를 먹어야 하는데. 찌개를 할 줄 모르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몸은 무거웠고 첫째도 어리지 게다가 비까지 오는 날 밖엘 나간다고? 에휴! 그냥 안 먹고 말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밥을 먹어도 속이 채워지지 않았다. 오로지 갈치찌개 한 숟가락이 먹고 싶어 군침만 자꾸자꾸 돌았다. 밥을 먹을수록 배는 자꾸 더 고파졌고 아무리 맛 좋은 것들이 내 앞에 있다 해도 갈치 찌개를 대신해줄 순 없을 것 같았다. 비는 내렸고 추웠다. 꼭 먹고 싶은 그 한 가지를 먹지 못하니 나는 더 추웠다. 자글자글 찌게 끓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고 칼칼하니 매콤한 냄새가 풍기는 듯도 했다. 내 속은 온통 갈치찌개 생각뿐이었다. 오로지 갈치찌개.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겠다 싶어 다음날 갈치찌개를 사 먹으러 갔다. 보글보글 식당 아주머니가 갈치찌개를 하는 동안 이제 곧 갈치찌개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난 더 안달이 났었다. 드디어 찌개가 앞에 차려졌고 국물 한 숟가락을 떠먹었다. '어! 이 맛이 아닌데. 내가 먹고 싶던 그 맛이 아니잖아. 하.... 그래도 먹는 게 어디야...' 아쉬운 맘에 서운하기까지 했다. 기껏 큰 맘먹고 사 먹은 갈치찌개는 돈값도 못했고 내 속도 채워주지 못했다. 오히려 갈치찌개 먹고 싶은 마음만 더 감질나게 만들었고 애타게 했다.


못마땅한 갈치찌개를 먹고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허전한지...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는데도 속은 텅텅 빈 것만 같았다. 기운도 없이 심드렁했다. 내가 먹고 싶었던 것은 어머니가 해주신 갈치찌개였던 거다. 고추랑 양파가 팍팍 들어가 달큰하면서 칼칼한 그 개운한 맛이 먹고 싶었다. 안 되겠다! "어머니 저 갈치찌개가 먹고 싶어요" 전화를 드렸다. "우짠다냐. 주말에 퍼뜩 내려와" 주말까지 기다려 어머니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칼칼한 갈치찌개 냄새가 맡아졌다. 바로 이 냄새지. 살 것 같았다. 어머니 냄새. 음식 냄새. 집안 가득 채운 냄새가 좋았다. 어머니 옆에 바짝 붙어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좋았다. 빨간 양념 옷을 입은 갈치 위로 국물이 자박거렸고 송송 썰어 올린 양파랑 파도 자작자작 양념이 잘 배었다. 한쪽 구석에 숭숭 썰어 넣은 고추도 바글바글 잘 익어가고 있었다. 풋풋한 고추향이 스며들어 국물에 감칠맛을 더해줬다. 군침이 금방이라도 똑 떨어질 거 같았다.


어머니가 맛보라며 국물 한 숟가락 떠 입으로 넣어주셨다 "으미! 맛나지" 어머니가 찡긋 웃으셨다. "맛있고 말고요. 이게 먹고 싶어서 죽을 뻔했어요" 엄살도 반쯤 썩어가며 엄지 척을 했다. 하지만 그냥 하는 빈 말이 아니었다. 먹고 싶은걸 못 먹으니 먹어도 먹는 게 아니었고 입맛도 달아나 살맛도 없었다. 그러니 살 거 같다는 말은 참말이었다. 지금껏 먹은 갈치찌개 중 최고였다.

     

이걸 만드느라 어머니는 바쁘셨을 거다. 시장까지 걸어갔을 발걸음과 갈치를 손질하느라 찬물에 담갔을 손과 불 앞에서 갈치 조리며 바라코 있었을 시간이 보였다. 음식이란 게 그냥 되는 게 아니었다. 그 속엔 무언가가 들어있다. 먹이고 싶은 사람을 향한 정성과 마음이 걸쭉하게 잦아들어있었다. 긴 갈치가 쪼그라들 동안 사랑도 찌개 한 그릇에 짜글짜글하니 배어든다. 먹이고 싶은 사람이 내가 된다면 사랑받는다는 행복이 좋아 울음보라도 터뜨릴 지경이 될 거다. 그런 게 집밥이겠지.    

           

드디어 밥상을 펴고 둘러앉았다. 하얀 밥에서 김이 났고 갈치찌개에서도 김이 솔솔 일었다. 국물부터 한 숟가락 떴다. 후릅! '바로 이 맛이야' 국물에 적셔먹는 갈치살은 보슬보슬하니 달았고 양념이 잘 베인 무는 뭉근하니 달았다. "어머니!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튀어나오는 감탄에 밥풀도 날아갔다.      

뭉근한 무와 야들한 갈치살이 내 목구멍을 넘어갈 때 나는 비로소 밥을 먹은 것 같았다. 몇 날 며칠 먹어도 먹은 거 같지 않게 자꾸 허기지던 속이 그제야 채워졌다. 살 거 같았다. 밥 한 그릇이 뭐야 밥 한솥은 내가 다 먹은 거 같았다. 이게 음식이구나. 살게 하는 게 음식이구나. 부른 속이 이렇게 편하다니... 그날은 잠자리도 달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단꿈을 꾸며 입마저 헤벌쭉 벌리고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집으로 올 땐 남은 찌개를 죄다 쓸어 담아 통에 넣어주셨다. "집에 가서도 밥 잘 먹거라"며 손에 들려주셨다.

다음 날도 냄비째 들고선 밥을 한 그릇 뚝딱, 두 그릇 뚝딱 해치웠다. 그리고 바닥이 보이던 날엔 양념까지 싹싹 밥 비벼 몇 날 며칠을 먹었다. 그렇게 먹고 싶던 갈치찌개를 먹고서야 다시 살 수 있었다.                 

                         

이제는 갈치찌개쯤은 만만한 음식이 되어 조기찌개, 가자미찌개, 고등어찌개... 생선만 달리하며 잘도 조린다. 큼직큼직하게 무도 숭덩숭덩 바닥에 깔고 고추, 양파도 송송 썰어 위에 올리고 마늘도 파도 넉넉하게 뿌린다. 어머니가 하시던 대로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갈치 위로 끼얹으며 맛있게 조려져라 불 앞에 서있다.                

뽀얀 갈치살 발라 아이들 밥 위에 올려주고 물컹한 무도 뚝뚝 숟가락으로 떠서 같이 옆에 둔다 "국물에 쿡 찍어서 먹어봐" 어머니가 하셨던 것을 이젠 내가 아이들에게 해준다.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은 아니어도 아이들은 맛나게 먹고 자란다.                


지금도 바다 푸른 곳에선 갈치가 은빛을 반짝이며 헤어 치고 있을 거다. 그날 추적거리며 내리던 비는 지금도 축축하게 내 맘을 적시고 있다. 서늘하게도 춥던 그날. 음식 하나로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주던 착한 손. 나도 그런 어머니 손이 되고 싶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먹고 싶어" 하며 아이들이 집으로 오면 좋겠다.

내가 해준 밥을 먹고 좋아선 헤벌쭉 웃으면 좋겠다.

그리곤 이젠 살겠다며 배를 두드리면 좋겠다.

그런 얼굴을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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