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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트 Feb 24. 2024

[소설] 인간생산시대_팍스

주간 라트 2408

창아가 먼저 일어나고 연산과 산모, 둘 만이 남게 되자 분위기는 달콤하고 러블리하게 변해갔다. 카페에 흐르는 음악도 시간이 늦어지면서 연인들의 사랑을 깊게 하는 음률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연산은 산모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에 손을 올린다. 산모도 연산의 동작에 거부 반응이 없이 연산에게 밀착해 온다. 


연산이 산모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산모야, 우리 팍스 하자."


"팍스? 청혼도 아니고, 지금 팍스 제안하는 거야?"


"그래, 팍스. 결혼은 너무 부담스럽잖아. 그렇다고 우리가 이렇게 계속 따로 살 수도 없잖아.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우리 아기도 태어날 텐데."


"산모는 연산의 '우리 아기'라는 말에 흠칫 놀라며 손가락을 연산의 입술로 가져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주변을 한 번 돌아본 후에 산모가 이야기한다.


"알았어. 좀 생각해 보자."


팍스(PACS)는 Pacte civil de solidarite(시민연대협약)의 약어로 사회적 연대의 차원에서 동성 커플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고자 1999년 프랑스에서 공표된 제도이다. '가족이 아닌 두 성인 사이'에 공동의 삶에 대한 계약을 공증인에게 또는 시청에서 공증받는 제도이다. 결혼한 부부처럼 세금이나 주거 문제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어서 동성 커플뿐만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이성 커플에게도 매우 환영받았다. 팍스는 해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요청해도 팍스 해지가 가능하다. 2007년부터는 각자의 재산을 분리하는 부부별산제를 기본계약으로 하여 팍스 해지를 예전보다 간결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자녀를 갖게 될 경우, 결혼한 부부와 달리 아버지는 출생신고 당시나 그 전후로 반드시 친자 확인을 해야만 법적인 친자관계가 성립된다. 이렇게 팍스를 해지하는 과정이 이혼 과정보다 수월함에도 불구하고 팍스 해지율은 결혼한 커플의 이혼율보다 낮다. 팍스의 본래의 취지는 동성 커플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해 주기 위함이었으나 2021년 시점에 동성 커플 간 팍스를 맺는 비율은 전체 팍스건수의 4%로, 원래 취지와는 달리 이성 커플이 월등히 많다. <이용철. 문경자. 유진현. 기영인. 허영인 공저(2021), 오늘날의 프랑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189. 190쪽


팍스는 프랑스에서 자리를 잡은 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가 현재는 대한민국에서도 젊은 남녀들이 결혼보다 많이 선택하는 가족결합형태가 되었다. 


연산이 이야기를 이어간다.


"지금 네가 임신하고 있는 아이를 우리가 입양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가족결합을 해야 한다고."


정부에서는 인간생산시설에서 태어나는 아이의 입양은 법적으로 가족결합이 이루어져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는 커플에게만 허락하고 있었다.


"나도 너와 결혼을 하든, 팍스를 하든 함께 살고 싶어. 그런데 그것이 우리 둘이서 결정하기는 어렵잖아. 나는 인간생산시설에서 태어났으니 법적인 부모가 없어서 문제가 없지만, 너는 부모님이 계신데,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아하! 그것이 걱정이었구나. 그것은 걱정하지 마. 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허락하는 분들이시니까."


연산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안도하며 이야기했다. 연산은 산모가 팍스 제안에 바로 동의하지 않는 것이 혹시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연산의 말을 듣고도 산모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이야기한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너의 부모님 생각은 다를 수 있어. 며느리가 아이를 셋이나 낳은 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락을 하겠냐 말이야."


"아니, 그게 무슨 문제야. 요즈음은 인간을 생산하는 시대라고. 그 옛날 조선시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네."


"그렇지 않다니까. 어쩌면 너의 부모님은 진짜로 조선시대 사고를 그대로 가지고 계신지도 모른다고. 당장 너 자신을 보라고, 요즈음 직접 부부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고 거액의 자비를 들여 자식을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고. 너의 부모님은 아직도 조선시대 유교 사상이 다분히 남아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해."


"너, 왜? 자꾸 불안하게 하냐? 하기야 요즈음 아빠는 자출당(자연출생당)에 입당하셔서 캠페인 활동을 하시느라 얼굴을 보기 힘드시니."  


"그것 보라고."


"하지만 걱정하지 마. 우리 부모님께 허락받는 일은 나에게 맡기라고." 




산모에게는 큰소리를 땅땅 쳤지만 연산도 산모가 한 말에 걱정이 되었다. 산모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산은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할까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커버 이미지 출처: 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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