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환대
작년 12월 31일, 나는 엄마와 경주로 향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의 첫날을 조금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경주까지는 운전으로 세 시간. 엄마와 올해 있었던 얘기를 하며 갔다. 그 이야기 속에는 얼음점부터 끓는점까지의 감정이 뒤섞였다. 차 안의 공기도 가벼워졌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3시간 대화로 나의 에너지는 소진되어 재빠른 충전이 필요했다. 기분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배가 고프다 하니 급해진다. 호텔 근처의 한식 뷔페에 들어갔다. 경주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하여 뷔페라는 단어보다는 한식이라는 단어에 이끌렸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식당의 공기가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영하권으로 내려가 강추위가 시작되었는데 이 식당은 에어컨을 틀어놓은 듯 공기가 찼다.
' 왜 이리 춥지...' 생각을 하며 허기진 배가 우선이라 몇 가지 음식을 접시에 담아 자리에 앉았다. 벗어둔 잠바를 도로 입었다.
샐러드와 나물 종류, 죽을 조금 담아 왔는데 죽은 미지근한 것보다 더 식은 느낌이고 첫 입에 넣은 나물도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고프니 일단 먹자는 마음이 우선이다. 접시 한 그릇을 비우기도 전에 사장님한테 식당이 너무 춥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오시더니 직원이 환풍기를 돌리고 껐어야 했는데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마주 앉은 엄마 표정을 보니 아뿔싸 라는 단어가 나를 휙 치고 지나갔다. 표정이 돌 씹은 듯 굳었고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엄마. 조금만 먹어. 대충 먹고 이따 맛있는 거 먹자. " 내 말에 다시 밥과 국을 뜨기 시작했으나 이내 또 먹기를 멈췄다. 말이 뷔폐지 온도가 중요한 한식이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나도 더 이상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식당에 들어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여행의 첫 식사부터 이렇게 어긋나 버리니 마음이 엉망이 됐다. 온갖 사는 얘기로 쳐진 내 마음 탓도 있으리라.
호텔 체크인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망설이다가, 호텔 근처에 있는 작은 미술관을 발견했다. 그 안에 카페가 있다는 걸 보고 우리는 그쪽으로 향했다. 카페에 들어서자 하얀 벽과 의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간은 밝고 깨끗했고, 따뜻했다. 식당에서의 차가운 기억을 빨리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카페 안쪽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갔다. 메뉴를 보는데 낯선 차 이름들이 있어 머뭇거리게 된다.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경주에 엄마와 오랜만에 왔는데, 첫 식사가 좋지 않았고 컨디션이 엉망이라고. 지금 이 상태에 도움이 될 만한 차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때의 난 간절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기분을 빨리 바꾸고 싶었다. 장면을 전환해야 한다.
직원은 몇 초 골똘히 생각하더니 오감차와 이곳의 스페셜 커피를 권해주었다. 그렇게 주문하고 번호표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직원이 양손에 쟁반을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순간 놀라서 내가 번호를 놓쳤나 싶었다.
" 제가 번호를 못 들었을까요? 너무 죄송해요!" 하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번호 부르지 않았어요. 사연을 들었거든요.”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기분을 조금이라도 바꿔드리고 싶었고, 경주에 대한 좋은 기억을 제가 드리고 싶어서요.”
그 두 개의 쟁반 위에는 차와 다식이 예쁘게 놓여 있었다. 그녀는 오감차와 다식이 어떤 의미를 가진 음식인지, 왜 이 구성이 좋은지 조용히 설명해 주었다. 찻잔마저 일반적으로 제공되는 컵이 아닌 특별한 잔을 꺼냈다며 도자기를 만든 작가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그녀의 눈빛은 호수에 비친 햇살처럼 맑게 빛났고 미소를 머금은 목소리는 포근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간중간 "어머" "세상에" 감탄사가 나온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전하는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한 어떤 감정이 가슴에 차오르며 눈물이 흘렀다. 생각보다 훨씬 주책맞게 눈물이 났다. 직원이 내 눈물에 당황한다. 웃기도 한다.
" 왜 울어요. 제가 슬프게 했어요?" 하며 농담을 건넨다. 그녀는 내 눈물이 마를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며 사담을 나누었다. 붉은빛의 오감차는 온몸의 온도를 끌어올렸고, 스페셜티 커피 역시 입안에 남았던 온갖 맛을 다 멀리 보내버렸다. 그녀의 환대에 식당에 대한 기억은 온데간데없고, 나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거움 마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경주에 머무는 동안 그곳을 여러 번 오갔다. 다른 카페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 공간에 남아 있는 온기가 나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 때마다 새로운 메뉴에 감동했다. 이후의 에피소드도 있지만 첫 순간을 우선 기록해 둔다.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한 게 없었다. 마지막 날 들러 이제 돌아가서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다 하며 고마움을 전하니 계속 찾아와 준 것에 되려 감사하다며 샛노란 고운 빛깔의 단호박 빙수를 맛보게 해 준다. 차가운 빙수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지니 한겨울의 강한 바람이 매섭지 않다.
헝클어진 내 마음을 뭉클하게 추스른 것은 차의 온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잠깐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준 환대였다.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보름이나 지났는데도 마음이 얼어붙으려고 할 때 그날 카페를 떠올린다. 그녀의 눈빛과 따뜻한 목소리가 나를 감싼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질 수 있지만, 또 생각보다 뜻밖의 환영으로 다시 숨을 고를 수 있다는 것을.
경주는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