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 살던 집이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훌쩍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만이 계속해서 들썩인다. 부러진 나뭇가지 회초리가 방바닥에 놓여 있다. 어머니는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소리친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늦었는지 말을 좀 하라고 좀 제발!”
답답함에 주름진 미간의 어머니는 왼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쿵쿵 때린다. 꿇어앉은 그의 허벅지와 맞닿은, 바지가 걷힌 종아리 살결에 빼꼼히 붉은 회초리 자국들이 드러난다.
일찍 끝난 개학식날. 피아노 학원을 깜박하고 친구 집에서 놀다 왔다. 학원에서 온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속이 터졌으리라. 그는 사정을 설명하려 하지만,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누군가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은 것처럼 입이 열리지도, 혀가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도 속이 터져버릴 지경이다. 난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건가. 화난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주변시에 비치는 배경이 화면 바깥으로 빨려나간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파하.' 물속에 있다 수면 위로 막 나온 것처럼 격렬히 숨을 내뱉었다. 띠리리리. 가쁜 숨에 맞춰 그의 가슴도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띠리리리. 누운 상태 그대로 그는 왼팔을 뻗었다. 띠리리리. 침대 옆 스탠드 위를 훑어 자그마한 와이어리스 이어폰을 집었다. 띠리리리. 왼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띠리리리.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람 꺼줘."
"띠리리리."
[네.]
알람이 꺼졌다. 그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깊게 호흡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 들어온 검은 배경 앞으로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품을 떠난 이후 점점 얼굴 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스마트폰 너머로 어머니의 목소리만 듣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순간 소셜미디어에 문장으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꿈속에서 우연히 보게 된 화난 어머니의 얼굴도 정말 그리웠다.
상념이 잦아들 때 즈음 문뜩 그의 입이 움직였다.
"제아야, 택배 도착했니?"
[네. 어제저녁 주문하신 재킷이 새벽 4시 20분경 현관에 배송되었어요.]
"지금 몇 시야?"
[9월 22일 금요일 오후 3시 2분입니다. 다행히 걱정하셨던 비 소식은 없네요. 오늘은 하루 종일 맑았어요. 저녁에는 조금 쌀쌀해지겠지만 데이트하기 좋은 휴일 오후입니다.]
나긋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제아가 답변을 이어갔다.
[주무실 때 눈동자의 떨림, 맥박, 호흡이 평소와 다릅니다. 좋지 않은 꿈을 꾸셨나 보군요. 햇빛을 쬐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그냥, 좀 서글퍼서. 고마워. 별로 신경 쓰지 마."
침실 커튼이 소리 없이 열리며 오후의 해를 맞이한다. 햇살이 그의 얼굴에 천천히 빛의 커튼을 드리웠다. 눈부심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길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 후, 오른손 바닥으로 침대를 밀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를 이불에서 빼내고 엉덩이를 돌려 침대 가장자리로 바닥을 디뎠다.
기다렸다는 듯 침대 맞은편 벽에 걸린 티브이 화면이 켜졌다. 세로로 길쭉한 얇은 티브이는 4 분할로 나뉘어 영상을 송출했다. 무음으로 분할된 네 화면에는 각기 다양한 색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화면의 어지러움은 그가 꿈의 여운에 취해 있게 놔두지 않았다. 그의 눈이 화면을 훑었다. 왼쪽 위에는 즐겨 시청하는 인플루언서의 영화 리액션 콘텐츠였다. 4 분할된 화면에서 로맨스 영화의 주요 장면과 그 방송인의 얼굴이 다시 한번 나뉘어 나타났다. 그 오른쪽으로 검은 머리 여성 앵커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앵커 아래로 '안드로이드 피싱, 개인정보 유출 피해 심각'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햇살 좋은 오후에 듣기 좋은 피아노 연주곡'이라는 제목과 조금씩 움직이는 화사한 초록 풍경이 있는 썸네일이 떠 있었다. 분명 들어본 적 없지만 친근한 멜로디의 조용한 음악이 흐를 거라 여겨졌다. 나머지 왼쪽 아래 화면에는 또다시 사분활로 나뉘어 작은 화면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 유사성을 가진 프랙털(fractal) 같았다. 얼음결정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티브이 쪽으로 걸어갔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뻗어 왼쪽 아래 작게 분할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화면이 확대되며 처음과 같은 식으로 네 개의 다른 영상이 떴다. 잠깐 훑은 후에 아래에서 위로 손가락을 쓸어 올리자 화면은 손가락에 걸려 잡아당겨진 듯 아래에서 위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아래로 아래로 수많은 다른 분할된 화면들이 바퀴의 단면처럼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움직임이 느려지며 마침내 정지하고 새로운 분할 화면들이 떴지만, 언제나처럼 어떤 것도 쉽게 그의 구미를 당기진 못했다. 화면의 제일 위쪽을 살짝 두드리자 다시 처음에 봤던 장면들로 되돌아왔다. 오른쪽 아래 피아노 연주곡을 가볍게 터치했다. 고요한 방에 어느 순간 울림이 큰 피아노 멜로디가 시작되었다. 그는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어디서 보기로 했지?"
[저녁 5시 서울역 근처 OOO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역사가 잘 보이는 창가 두 자리로 예약해 놓았습니다.]
"스읍.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만나는 자리에 중식당은 좀 그렇지 않나?"
[저도 그 의아함에는 극히 공감합니다. 소개팅 첫 만남에서 중식은 그렇게 선호되지 않습니다. 삼겹살, 찜닭, 감자탕 등의 메뉴와 비슷한 수준이며 순댓국, 조개구이, 복국보다는 조금 높은 정도입니다. 다만 그분의 PAIS(Private AI Secretary)와 페어링 하여 얻은 최근 2년 간 그분의 피드, 결제 내역, 경로 등의 데이터와 승호님의 음식 취향, 디지털 통장 잔고 등의 데이터를 함께 분석한 결괏값은, 아마 동의하시겠지만, 상당히 신뢰할 만합니다. 서로 만족도가 높은 메뉴라는 점이 그 의아함을 압도한다 여겨집니다.]
"가장 최적화된 시간, 위치, 메뉴라 이 말이지."
[그렇지만 혹시 다른 메뉴를 원하시면 다시 검색해 보겠습니다.]
"아냐, 아냐. 그 식당으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