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다. 여유가 있었다. 시간 약속에 대한 부담감 역시 어느 순간 제아에게 위임하였으니 그가 성급해질 이유는 없었다. 혹시 도착 시간이 늦더라도 그의 똑똑한 PAIS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상대방에게, 정확히는 상대방의 PAIS에게, 양해와 변명의 유려한 메시지를 전달할 테니.
이를 닦은 후, 그는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새 양말을 신었다. 스마트워치를 차고 새로 산 재킷을 걸쳤다. 어제 쇼핑을 하면서 제아가 제공해 준 조합이었다. 신발장에서 오랜만에 꺼내 신은 구두는 발뒤꿈치가 딱딱하게 자꾸 쓸리는 느낌이지만,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 이 정도 불편함은 몇 시간 정도 참으면 될 거라 쉬이 여겼다.
현관문 도어록 손잡이를 돌리자 '지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문이 밖으로 열렸다. 엘리베이터는 오직 그만을 위해 17층 복도에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엘리베이터를 가진 이 신축 아파트는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당첨된 12평짜리 청년임대주택이었다. 작은 평수지만, 좋은 입지에, 꽤나 괜찮은 시설에, 무엇보다 싼 보증금이 강점이었다. 당시 병실에 누워 연명하시던 어머니가 무척이나 좋아하며 손뼉 치시던 모습이 문뜩 떠올랐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1층을 터치하였다.
그러나 곧 엘리베이터 오른편에 빽빽이 들어찬 움직이는 관리사무소의 안내자료, 공지사항, 홍보자료들로 시선을 옮겼다. 뒤쪽 큰 스크린에는 화려한 광고와 교육용 화재 훈련 영상이 쇼츠처럼 휙휙 지나가고 화면 가장자리에도 뉴스 문구며, 날씨 같은 조각난 정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이 모든 화려한 면은 왼쪽에 붙은 전신 거울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 소실점까지 깊게 사각형의 동굴을 만들었다.
일순 떠올랐던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은, 겹겹이 쌓여 시선과 관심을 치밀하게 강탈하는 수많은 하찮은 콘텐츠에 바스러졌다. 1평 남짓한 공간의 사방에 시선이 꽂혀 둘러보는 와중에 '팅'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택시 도착했니?"
[5분 뒤에 1514동 1층 현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는 현관 앞 계단에 서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전화를 할 때나 소셜미디어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시간이나 날씨 등을 확인할 때도 제아를 통하지만, 짧은 시간 무언가를 기다릴 때 그의 위로가 되어주는 것은 언제나 6인치짜리 화면을 가진 스마트폰이었다.
날씨를 확인하고 친구인지 아닌지 정의하기 어려운 친구들의 피드를 빠르게 스크롤했다. 커뮤니티의 유머나 뉴스, 신변잡기에 관해 작은 글씨로 쓰인 글을 훑던 중, 택시가 도착했다. 차가 멈추고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그가 타자 문이 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운전석은 비어있었지만, 핸들이 스스로 회전하며 차는 다시 출발했다.
보조석이 앞으로 주욱 밀착해 있어 그는 편하게 다리를 펴 앉을 수 있었다. 택시 안은 에어컨이 켜져 있어 적당히 시원했다. 엔진의 시끄러운 소음도 없었고, 창문은 방음이 되어 바깥소리는 작고 먹먹하고 아련하게 들릴 뿐이었다. 가끔 차선변경을 위해 켜지는 깜빡이 소리만이 딸깍딸깍 울렸다.
적막 속에서 그는 앞 좌석 뒤편 화면 속 내비게이션을 보았다. 지도 속 안내 길로 짙은 파랑의 선을 따라 그가 탄 차가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공간에 오롯이 혼자인 것은 별 것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가 빈 적막은 참기 힘들었다.
”라디오 방송이나 틀어줘.“
[네. 알겠습니다.]
제아의 대답과 함께 곧 익숙한 BGM이 깔렸고 유려한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약 30년 전 1000여 명의 네덜란드 인들을 대상으로 행복과 휴가의 관계를 알아본 연구가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휴가 이전에는 휴가 계획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왔죠. 다만 휴가 이후 이 두 그룹의 행복도를 비교해 봤을 때는 신기하게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변수가 같다고 봤을 때, 휴가 전에 더 행복했던 그룹이, 그 계획대로 휴가를 보낸 후에도 더 행복할 거라 추측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죠. 두 집단의 차이는 휴가 계획의 유무 밖에 없었거든요. 그리하여 연구자들은 여행 전과 여행 후 두 집단의 행복감이 변화한 이유는 휴가 전 계획을 하며 가진 기대감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떠나야지‘라는 막연하던 생각이 조사를 하고, 일정과 동선을 짜고, 예약을 하면서 구체화시키면서 사람들이 설레고 행복해진다는 말이죠.
그 연구에 관해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요즘 우리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한다면 과연 같은 결과가 나올까 하고 말이죠. 다름 아니라 저만해도 최근에 출장차 다녀온 여행을 직접 계획하지 않았거든요.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제 PAIS인 풀잎이가 모든 계획과 예약을 처리해 주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덜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행이 끝난 후 되돌아보면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했던 거 같아요. 일과 휴가가 뒤섞인 일정이었지만, 좋은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 모든 이야기를 소셜 피드에 올리며 공감받았으니까요.
그 연구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비전문가인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기대감뿐만 아니로 공감과 애정도 행복해지는데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도 저희 <붉은 서재>를 찾아주신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DJ 김서진입니다.]
그가 가끔씩 듣는 책 리뷰 콘텐츠의 오프닝 시그널과 멘트였다. 문뜩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지, 설레은 감정을 찾을 수 있는지, 그는 자문해 보았다. 말이 블라인드 데이트(blind date)이지, 이미 서로의 외모와 나이, 직업과 연봉, 학력에 관한 데이터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보다 구체적인 데이터, 이를 테면 어느 지역 출신이며 어떤 패턴의 삶을 살며 세상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취향과 호불호는 어떤지 등등 역시 유목화된 데이터를 통해 이미 공유가 되었다.
애초에 과거에 블라인드 데이트라는 용어의 유래가 가진 전통이 다 깨어진 마당에, 이게 블라인드(blind)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위화감이 들기까지 했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상태로 첫 만남을 가지는데 설렘과 기대가 있는가.
그 설렘을 찾던 와중에 고요한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