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억을 더듬다 보니 어느 틈에 샤워를 끝냈다. 더 최신의 아파트였다면 화장실 한 면에 방수 스크린과 마이크, 스피커를 내장하여 PAIS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영상도 즐길 수 있었겠지만. 티브이와 커튼, 냉장고와 에어컨, 서재와 벽에 내장된 스피커, 수도와 정수기, 도어폰까지의 IoT(Internet of Things)와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PAIS 제아, 이 정도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매달 차곡차곡 청구되는 데이터 사용료와 기기 임대료, 티브이, OTT, PAIS 등의 서비스 구독료에 허덕이는 통장 잔고는 그를 다그치고 제지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어디서 보기로 했지?"
몸을 닦고 속옷을 갈아입은 그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저녁 5시 서울역 근처 OOO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역사가 잘 보이는 창가 두 자리로 예약해 놓았습니다.]
야식 후에 아침과 점심을 걸러서였는지, 그는 상당히 허기졌다. 그러나 곧 중요한 저녁 약속을 앞두고 배를 가득 채울 수는 없었다.
"제아야. 냉장고에 간단히 배 채울만한 거 없니?"
[지난밤에 남은 닭강정과 콜라, 고모님께서 보내주신 밑반찬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다만, 햇반이 없어 드시지는 못하겠네요. 냉동실에는 유통기한이 일주일 지난 식빵 다섯 장과 냉동 만두, 지난 설에 고모님께서 재워두신 제육볶음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냉장고 전면 스크린을 참고하세요.]
"유통기한 지난 식빵 먹어도 되나?"
[몇 가지 조건이 맞으면 드셔도 됩니다. 유통기한은 제조사에서 판매를 권장하는 기간인 반면, 소비기한은 실제 섭취해도 되는…]
"그래서 먹어도 되냐고?"
[기간을… 네. 우선 지난번에 제가 권고해드린 대로 냉동실에 보관했다는 점은 칭찬할만합니다. 다만 빵의 질감, 냄새, 상태, 곰팡이 유무 등을 따져보실…]
“짧게 답해줘.”
[필요가 있습… 네. 짧게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먹어도 됩니다. 다만, 최근 2 주 간 일곱 건의 배달음식을 드셨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세요. 탄수화물을 줄이실 것을 권합니다.]
"흠.."
언제부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 선택과 결정을 제아에게 외주화 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단순히 흩어진 정보를 정리하고 여과하게 하였다. 그러다 정보를 요약하고 맥락에 맞는 최적의 선택지를 선별하고 도출하게 시켰다. 선택과 결정에 필요한 과정을 제아에게 위임하기 시작했다. 깨닫고 나서 보니 그 자신의 선택과 결정보다 제아가 주는 값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사고의 외주화를 처음 깨달았을 때 그는 공허한 회의감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그 진공 상태에 쉽게 적응했다.
"너라면 식빵 먹을 거냐?"
[네. 저라면 식빵의 상태에 큰 이상이 없다면 토스터기에 구워 먹겠습니다.]
그는 식빵을 두 장 꺼내 토스터기에 넣어 구웠다. 그리고 소파에 던져놓은 택배박스를 뜯었다. 어제 주문한 짙은 회색의 자켓을 꺼내 입어 현관에 있는 전신 거울에 몸을 비춰봤다. 어깨 부분이 살짝 당겨 불편할 수도 있지만 최적의 사이즈와 색이었다. 물론 제아의 추천과 의견을 들은 후 구입하였다. '척' 소리와 함께 토스터기는 갈색으로 잘 구워진 식빵을 내뱉었다. 그는 자켓을 벗어 소파에 걸쳐두고 뜨거운 식빵을 접시에 옮겼다.
접시와 냉장고에서 꺼낸 남은 콜라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 옆 협탁에 접시와 콜라를 내려놓고 식빵 하나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리모콘으로 티브이 화면을 돌렸다.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에서 다시 무음의 4 분할 화면으로 바뀌었다. 식빵을 먹으며 스크롤 무브를 하며 화면을 상하좌우로 전환시켰다. 지겨운 콘텐츠의 연속이라는 듯이 콧바람을 길게 흐응 내뱉고 그는 말했다.
"제아야, 티브이 꺼."
[네.]
화면은 곧바로 꺼졌다.
"오늘 저녁 몇 시에 보기로 했지?"
식빵을 다 먹고 남은 콜라를 들이킨 후 그가 물었다.
[저녁 5시 서울역 근처 OOO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역사가 잘 보이는 창가 두 자리로 예약해 놓았습니다.]
"지금 몇시야?"
[현재 3시 38분입니다.]
“서울역에 5시에 도착하려면 어떻게 가야 돼?”
[전철, 택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전철을 타려면 3시 50분에는 출발해야 하고, 택시를 이용하려면 4시 10분 즈음 출발하면 됩니다. 두 방식 다 약속시간에 10분 정도 여유 있게 도착하게 됩니다.]
“그럼 택시 예약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