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록소록 Jun 16. 2023

오늘의 발차기


 

 수영을 등록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구민 체육센터 내 수영장이다. 저렴하고 깨끗해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추첨에 성공해서 등록하려면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등록 신청을 했는데 덜컥 당첨이 되었다. 행운의 여신이라도 된 듯 뿌듯한 마음으로 결제를 마쳤는데 알고 보니 실버 수영 타임이다. 잠시 멈칫했으나 내 체력도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나을 게 없다는 생각에 오히려 안심이 된다.



 넓고 밝은 수영장이었다. 한 면 가득 유리창이 있어 반짝이는 햇살도, 키 큰 나무도 보인다. 수많은 동네 실버들의 조잘거리는 음성이 수영장 가득 울리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만 참새 소리를 내나 했는데 노인들도 기분이 좋을 땐 높고 꾀꼬리 같은 수다가 참새 소리를 닮아 있다. 예상대로 코치는 나를 제일 끝 라인, 그러니까 초급자 레인으로 배정해 주었다. 같은 레인에 배정된 이들과 눈인사를 나누는데 평균 연령이 대충 칠십 정도가 될 것 같다. 물 밖이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지 않을까 하는 할아버지도 있고, 검버섯 가득한 피부에 초등학생처럼 천진한 미소의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쪼글쪼글한 얼굴에 꽉 끼는 고무 수영모와 콩알만 한 수경을 끼고 조잘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미소 지어진다. 자유형을 할 땐 얼굴이 안 보여 나이를 가늠할 수 없으나 배영을 하면 동그랗게 모아 호흡을 내뱉는 쪼글쪼글한 주머니 같은 입이 물 위로 동동 떠오른다.



 실버 수영답게 오십 분의 수업은 십오 분의 준비 운동과 한 번 헤엄치면 돌아올 땐 걸어오게 해주는 아량 넓은 프로그램이라 딱 마음에 든다. 할머니들은 처음 온 내게 이래라저래라 말씀도 많다. 젊으니 금방 배울 거라 용기도 팍팍 실어주는 데다 주름진 미소로 그렇게 사랑스럽게 쳐다봐 준다. 오십 살을 넘긴 나는 수영장에선 꽃 같은 새댁이 된다. 중급자 레인에는 오리발을 낀 채 종횡무진 릴레이로 헤엄치는 활기찬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다. 그들의 기운은 높은 수영장 천장도 뚫을 것 같다. 출발 순서를 기다리며 그들의 화려한 몸동작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된다. 온몸과 두 팔로 수영장 물을 다 쓸어갈 듯 물을 가르며 줄지어 전진하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수족관에서 있는 힘을 다해 펄떡이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싱싱한 활어의 모습 같다. 검버섯 가득한 피부의 노인들에게서 싱싱한 활어를 연상하게 하다니 어떤 영화의 한 장면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레슨을 등록하면서 노인의 기운을 닮아가지 않을까 했던 내 염려를 우습게 날려버렸다.



 세바시 프로그램에서 본 김훈 작가의 강연이 생각났다. 작가는 매해 삼월이 되면 동네 초등학교 입학식엘 가본다고 했다.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생기와 젊은 엄마들의 기대와 친밀한 에너지를 바라보는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충만한 기대와 기쁨이 가득한 그 공간을 이야기할 때 어눌한 작가의 말에서도 생생한 기운이 느껴졌다. 11월 수능시험일에도 수능장 앞을 가본다고 했다. 긴장된 모습으로 수능장으로 들어가는 학생들과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따뜻한 차와 응원의 메시지를 던지는 후배 학생들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응원과 연민의 마음을 보태는 작가의 마음에 내 마음이 겹쳐졌다. 작가는 각기 다른 분위기의 장소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의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지만 역동적으로 어딘가로 흘러가는 열정과 충만한 기분. 살아 있기에 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라는 거다.



 우리가 타인의 마음과 기운에 함께 감응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입학식에서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생기발랄함에 내 마음도 싱싱해지고 수능장에서 긴장되어 위축된 학생들을 보면서 함께 응원하게 되는 기운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른다. 아름다운 자연에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끊임없이 철썩대는 파도 소리에 위로를 받는 인간의 마음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마음에 대해 김훈 작가는 인간 내면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존재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간 자체가 자연의 일부이기에 감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으니 우리의 존재가 고귀하게 느껴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충만한 순간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에 아름다운 것인가 보다. 인간이 이루어 낸 대단한 성공이나 업적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해내려고 노력하는 인간이 아름다운 거라고 말하는 작가의 시선에 깊게 공감한다. 보이지 않는 고통과 걱정이 가득하기도 한 삶이지만 그 삶을 이겨내고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힘이 세상을 이끌어나간다. 열악해지는 기후에도 자연은 생존하고자 고군분투하며 스스로를 지키고 있고, 인간들 역시 열악해지는 노동과 환경 속에서도 지지 않으려고 힘을 모은다.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처럼 우리도 본능적으로 살아남는 투쟁을 벌인다. 생명의 본능적인 힘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지키려는 아름다운 힘이기도 하다.



 수영장에서 만난 노인들에게도 짊어지고 있는 걱정과 고통은 다양하고 넓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발차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노인들에게 나는 매번 충만한 에너지를 받는다. 수영장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여윈 다리로 힘차게 발차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마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고귀한 삶의 태도가 아닐까. 삶이 던져놓은 고통의 의미를 고민하기보단 오늘의 발차기에 마음을 모으는 얼굴에서 나는 살아있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