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또 잊었다. 며칠 전, 동훈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더니 엄마는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이번엔 잘 기억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건 내 오산이었다. 함께 사는 유일한 손자 생일을 기억하는 일은 요일도 잊고 지내는 엄마에게 역시 무리한 기대였나 보다. 생일날 늦은 오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왜 동훈이 생일이라고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는 원망 가득한 목소리였다.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 우리 엄마구나 싶어 할 말을 잊었다. 미역국도 끓이지 못했다는 엄마의 다급한 말에 급히 식당을 예약했다. 이런 수순이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번이 세 번째다. 조카가 엄마와 함께 살았던 시간을 헤아리면 매년 생일이 이렇게 흘러간 게다. 동훈이도 우리도 이 상황을 그저 웃고 지날 수밖에. 다음번엔 "할머니, 저 미역국 먹고 싶어요." 란 멘트로 암시를 주기로 결론지었다. 엄마도 함께 웃었지만 자책하는 엄마 마음이 투명 유리처럼 다가온다.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다. 집 전화를 이용할 사람은 집안의 노인들 외엔 없다. 역시나 시아버지였다. 어디가 아프신 건가 덜컥 겁이 났다. 우물쭈물 당황해하며 남편을 바꿔달라 하신다. 부엌일을 하면서도 걸려온 전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남편은 연신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그의 억양이 엄마와 통화하는 내 모습과 닮아 있다. 종아리에 붉은 반점이 생겨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갑자기 솟아난 반점은 아니다. 이른 아침에 전화를 한 것은 당신의 증상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전염병 엠폭스(원숭이 두창 질병)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제 본 뉴스가 밤새 생각나고 가슴이 두근거려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하신 거였다. 남편은 그렇지 않다고 안심을 시킨 후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노인은 슬프다. 예전 같지 않은 현재의 몸과 마음 때문에 슬프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또 슬프다. 그 슬픔과 두려움이 단순한 연민과 동정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나도 노인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될 거라는 게 절박한 기후 위기의 수순를 점치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1900년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이란 하찮은 물건'이라고 냉정하게 읊어대지 않았던가. 세상은 급속히 변화하지만 노인을 위한 배려는 예전도 지금도 없다. 새롭고 열정적이고 스피디한 세상 속에서 노인은 고독해질 뿐이다. 몸과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세상은 점점 내 존재에서 멀어져 간다.
아침 산책길에 마주치는 요양원이 있다. 쾌적한 환경과 더불어 관리가 비교적 잘 된다고 알려진 조용한 요양원이다. 요양원 담벼락을 따라 걷는데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무슨 소리인지 묻지 않아도 온몸의 세포가 그 소리를 흡수하고 있었다. 노인의 신음 소리였다. 정말 몸이 아파서 내는 소리인지 온 세상 우울한 마음이 늙은 몸을 뚫고 나오는 소리인지 알 수는 없다. 순간적으로 내 귀에 들렸던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닌 동물의 본능적 신음같다. 왜 나를 데려가지 않느냐고 신에게 하소연하는 원망의 저주처럼 들린다. 못 들은 척 얼른 지나치고 싶었다. 지옥이 존재한다면 이런 신음으로 가득한 공간이 아닐까.
그들에게 어떤 청춘이 지나갔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들이 겪어내는 현재의 힘겨움을 이해할 뿐이다. 노년이 방탕한 청년 시절의 결과물일 수 없고 각자 노력으로 더 향상될 거라 단정 지을 수는 더더욱 없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일하게 젊음과 노년의 물리적 시간을 겪어내는 일이 신이 주신 유일한 공평함일지 모르겠다. 현재의 내 젊음을 노년 앞에서 뻐길 수 없고, 그들의 노년을 내가 조롱할 수 없는 이유다. 늙어가면서 돌아가신 노부모의 마음을 떠올리는 것도 그들의 늙음을 무심히 지나쳐버린 후회 때문이 아닐까.
엄마의 깜빡거리는 기억력도, 시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두려움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만 그 감정에 빠져있기엔 지금의 내 젊음도 빠르게 소멸 중이다. 내 의지로 훗날을 약속할 수 없다면 그저 현재를 깊이 살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내일 노년이 되더라도 지금의 젊음을 기쁘게 보내는 것이 신이 주신 공평한 인생을 알차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무기력한 결론이라 말해도 도리가 없다. 인간이란 운명을 거스르기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은가.
노년에 대한 안타까움과 두려움은 이제 잠시 잊기로 한다. 건강한 다리로 산을 오르면 봄기운 가득한 숲과 새들이 활기찬 기운을 주고 아직은 맑은 시력으로 깨알같은 글씨의 아름다운 글들이 나를 미지의 세상으로 데려다 준다. 친구들을 만나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경험과 여유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들이 활기를 띤다. 이십대의 청춘에 그 절정의 에너지를 모른채 누렸듯이 지금 중년의 시간도 노년을 모르는 듯 즐기고 싶다. 젊어서 놀고 싶다고 후렴구로 쉼없이 반복하며 노래부르던 우리 선조들의 마음이 이 마음이었을까.
시아버지는 병원에서 엠폭스가 아니라는 확답을 받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스테로이드 연고 덕분에 반점도 사라졌다. 멀리서 불어오는 풍랑을 익히 알고 있지만 현재의 아름다운 파도에 몸을 실어 두려움없는 오늘을 살아내는 일이 내게도 시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오늘의 과제다.
*제목은 예이츠의 시<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그림은 쟝 줄리앙의 작품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