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엄마가 측은하다고 생각했다. 엄마 나이 오십이 훌쩍 넘었다는 걸 안 직후였다. 반백 살을 넘긴 여자의 삶이란 이팔청춘이던 내게 무의미해 보였다. 희망이란 젊은이에게나 가능한 일, 나이 든 이들에겐 잡지 못할 신기루이기에 자식의 삶을 훔쳐보거나 간섭하는 게 아닐까 했다. 지금, 나는 그 희망이 없다고 느꼈던 나이를 지나고 있다. 오십이 넘어도, 아니 칠십, 팔십이 넘어도 내일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걸 엄마 나이가 되니 비로소 알게 된다. 철없던 시절의 방자함이었다. 청춘을 소진하는 시간을 보내며 내게도 닥칠 어김없는 세월이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불안으로 가득했던 젊음은 광활하게 열린 가능성으로 오만하기도 했다. 희망은 청년의 특권이기에 감히 나이 든 이들이 엿볼 수 없는 것이라 단정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은 이런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정신 차리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우연한 삶의 모퉁이에서 만난 위기들은 희망을 붙들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었다. 희망은 어느 순간에든 붙잡고 나아가야 하는 동아줄이었다.
원로 명배우들이 상연한다는 사무엘 베케트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았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인생을 이야기할 원로배우들의 연기가 관람 전부터 설레게 했다. 지금이 아니면 명품의 연기를 놓칠세라 많은 관객이 모여들어 응원하고 있었다. 기대에 걸맞게 명 배우 신구와 박형근은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 공과 블라디미르를 훌륭하게 재현해 낸다. 소외되고 늙은 모습으로 누추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은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린다. 이내 힘이 빠져 혹은 희미해진 기억 때문에 돌아가겠다는 에스트라공에게 블라디미르는 마치 후렴구를 되뇌듯 '고도를 기다려야지!' 하고 상기시킨다.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그들에게 고도를 기다리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라도 올 것이라고 정말 믿은 것이었을까, 믿는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일까. 믿음이 없다면 언제든 삶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오지 않고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는 끔찍한 상황에서 오직 그들이 찾아낸 할 일은 고도를 기다리는 방법이 유일했는지 모른다. 기다림으로 이어지는 일상은 습관이 되고 만다. 블라디미르는 "습관은 우리의 모든 이성을 무디게 하지."라고 말한다. 내일이면 고도가 꼭 온다고 했다는 소년의 말을 믿는 건 무딘 이성 때문이기도 하다.
연극이 2막으로 이어지면 관객은 점점 더 초조해진다. 관객도 한마음이 되어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게 된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기다려온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따뜻한 위로라도 한 마디 건네주길 염원하는 처지가 된다. 배우들이 주고받은 대화와 위로는 우리가 매일 겪는 하루하루이기도 하다. "이 세상 눈물의 양은 정해져 있지. 누군가 울기 시작하면 다른 누군가는 울음을 멈추겠지. 웃음도 마찬가지야." 내일이면 나은 미래가 올 거라 서로를 다독인다. 늙은이에겐 건강이 나아지리라, 아이들에겐 자유로운 미래가, 그리고 노동자들에겐 안정된 내일이 있을 거라 위로한다.
베케트는 고도가 신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만약 작가 자신이 고도가 뭔지 알았다면 작품에 등장시켰을 거라는 말을 남겼다. 고도가 뭔지 모른 채 우리도 삶에서 먼 곳을 응시하게 된다. 시지프스의 돌을 어깨에 진채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도 괴로움과 슬픔, 그리고 행복의 순간은 존재한다. 어제의 슬픔을 다독이며 내일은 고도가 올 거라 되뇐다. 팔순을 넘긴 배우들이 농담처럼 주고받는 대사가 명치 깊은 곳을 파고든다. 각자의 일상이 고유하다고 생각되지만 내부에는 인간의 공통된 고뇌가 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청춘의 시기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 희망을 죽음을 앞둔 노인의 마음으로 함께 기다린다. 모두의 어깨에 희망은 평등하게 걸쳐져 있다.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에서 희망은 독한 허무를 자식처럼 품고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고 한다. 희망이 이루어진 후 느끼는 희열 뒤에는 무엇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할지 모를 허무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허무를 두려워하며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꼭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가슴에 묻어둔 작은 소망들이 매일을 살아가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인간의 숙명이다. 작고 높은 파도에 몸을 실은 채 흔들리며 나아간다. 매 순간 우리의 고도가 저 멀리서 깃발을 흔들어 주길 바랄 뿐이다. 고도가 오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봄꽃이 흐드러지고 딴생각만 가득했던 나른한 강의실을 기억한다. 퇴직을 몇 년 앞둔 노 교수가 몽롱한 눈빛을 창밖으로 던지며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빼곡한 글자 너머 노 교수는 수 세기 전 작가가 고민했던 사랑과 희망에 대해 생경하게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호소했다. 손에 잡히진 않지만 꼭 짚어 이것이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문학에, 우리의 인생사에 존재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 느낀 순간이었다. 불투명한 교수의 언어가 허우적거리는 내 상상의 어느 지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꿈을 꾸는 시선의 노 교수는 육십 언저리의 나이였지만 소녀의 눈빛이었다.
팔순이 다 된 엄마는 오늘도 성경을 필사하며 새로운 필체를 배우고 있다. 예쁜 글을 따라 적을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엄마는 이제야 재능을 발견한 듯 즐거워한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작품을 이야기하며 촉촉한 눈빛을 보내던 노 교수는 지금도 아름다운 글에 감응하며 남은 시간을 풍족하게 채우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가장 짧은 시간 타오르던 폭죽 같은 젊음도 아름답지만 꺼질 듯 희미하나 은근하고 끈질긴 불빛의 생명력도 창연하다.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채우는 일이 소중하다. 불빛이 꺼지는 그 순간에도 고도라는 작은 풍선의 끈을 손에 쥐고 나아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