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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루 May 29. 2023

그의 향기를 기억하며

#. 프롤로그


잊기 위해선 기억해야 한다.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 그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바라보던 나를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보던 그를 기억하며 그를 잊어가야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렇게 될 것임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1. 집


우리들은 낡은 단독주택의 층을 경계로 대칭이었다. 나는 청년이었고, 할아버지는 노인이었다. 내가 스마트폰으로 무한도전을 볼 때, 그는 낡은 티브이로 전원일기를 보았고 내가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끓여 먹을 때, 그는 전기밥솥의 밥과 고추장으로 끼니를 때웠다.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다만 서로의 생사를 확인해 주고 있었을 뿐이다. 다르게 보이는 두 사람의 생태적인 지위는 거의 비슷했다.


그의 비보에 나는 이층에서 일층으로 내려가 그의 방문을 열었다. 그 방엔 그가 없는지 한 달은 지났지만, 그로 가득했다. 그의 냄새는 그의 지갑 주름에도 박혀있었고 이미 형체를 알 수 없게 닳아버린 주민등록증에서도 남겨져 있었다. 그 공간의 냄새는 그 공간에 속한 모든 것과의 접촉에 거부감을 일으켰다. 나는 얼른 주민등록증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손을 씻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지만, 그의 큰아들이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길, 별 생각은 없었다. 주머니 속 지갑이, 그 지갑의 냄새가 거슬렸다. 나에게 그 냄새가 배기지 않았나 괜스레 코를 킁킁거렸다. 그의 죽음이 사실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체취가 그리워지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2. 중환자실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반드시 슬픔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의 많은 자식들이 속속들이 중환자실 앞에 모였다.  예정되어 있던 사건이, 예측 가능했던 시간 안에 그들에게 통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항상 낯선 것이었나. 그의 자식들은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나 또한 슬퍼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나에겐 오히려 아쉬움보단 감사함이 먼저 다가왔다. 중환자실의 병원비 결제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이 먼저 들었고,  담배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 요양원이나 병원에 절대 가지 않으려던 그의 미련함에도 감사함을 느꼈다. 이런 생각들은 표현되지 말아야 하는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나를 기억함에 나를 속임은 없어야 한다.


감사함 다음엔 측은함이 다가왔다. 깨끗한 피를 만들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는 몸에서 해방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10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때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부어버린 몸과 다물지 못한 입은 마지막 한숨을 삼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저것 또한 죽음의 한 모습이리라. 사느라 고생하셨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러한 감정들 뒤로 오는 것은 아이러니함이었다. 그가 살아있음을 바랐던 마음과 그로 인한 어떤 종류의 부담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은 어지럽게 꼬여 있었다.  두 가지 다른 마음이 부딪혔던 이유는 내가 그의 자식들보다 유전적 거리가 1/2만큼 더 멀어서였을까. 둘 중 하나만이 맞는 마음인 것일까. 피했던 질문들이 나를 쏘아댔다.




#3. 장례식장


죽은 자에 대한 슬픔보단, 죽은 자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파동이 되어 공간을 채웠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곳은 이상한 곳이다. 그에 대한 애도보단, 그를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주가 되었다. 3일과 49일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누군가의 부재를 사회적으로 정리하고, 정신적으로 익숙해지는 시간이 아닌가 싶었다.


그의 여동생의 곡소리는 가히 채음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할 만큼 일품이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은 그들의 스토리는 곡소리 속 그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구박만 하던 오빠를 매일 챙기러 오던 여든이 넘은 여동생은 그의 영정사진 앞에서 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곡소리가 구슬펐다. 구슬펐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녀의 오열에 나는 처음으로 그의 죽음과 연관된 슬픔을 느꼈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잘해준 것 하나 없는 그에 대하여 왜 이렇게 슬퍼하느냐고 그의 큰딸에게 물었다.

그래도 우애 좋은 육 남매를 낳아주지 않았냐는 그녀의 대답에 나도 반박할 순 없었다. 어찌 되었던,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계산할 수도 없는 어떤 무엇인가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에게 수여되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가 각자의 방법으로 이별했다. 그것이 슬픔이든 슬픔이 아니든 말이다.





#. 에필로그


할아버지 방엔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많이 있었다.  그가 사놓은 쓰레기봉투에 그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쑤셔 넣었다. 수십 개의 쓰레기봉투가 집밖으로 나가도, 그의 체취는 그만큼 늙어버린 물건들에 접착되어 있었다.

그의 물건들을 모두 버렸어도, 비릿한 냄새가 그 공간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향을 피웠다. 향은 공간의 냄새를 태우며 퍼져나갔다. 향의 끝에서 그와 부딪히며 붉게 타 그의 공간을 채웠다.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그를 기억하는 행위기도 했지만, 그를 공간에서 지우는 행위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의 방에서 향을 피우는 나는 그를 기억하면서 그를 잊고 있었다.


공간 속 냄새가 옅어지며 향의 향기는 짙어졌다. 그의 공간은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 같았다. 편지의 내용은 그 냄새를 지우면서 계속 드러났다. 나는 앞으로 어떤 향기를 내가 남긴 자리에, 나를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까. 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보이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지 사무치게 이제 없는 그가 나를 가르친다.


글을 쓰는 것 역시 향을 피우는 것과 같았다. 그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를 정리하여 잊겠다는 그에게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억함으로써 잊어나가야겠다. 그의 방에 향을 피우며, 그를 계속 지워 나가야겠다. 그의 편지에 대한 나의 답장은 다시 나의 공간의 향기로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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