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 : 오디사 편
6시 쯤 일어나 버스를 타고 세컨드라바드 역으로 향했다. 부바네스와르로 가는 기차표를 모바일로 끊었기 때문에 호스펫행 기차표를 취소하려고 했지만, 취소할 수 있는 매표소는 9시가 되어야 취소가 가능했다. 이 표도 모바일로 샀다면 바로 취소를 할 수 가 있었을 건데...
내 기차는 9시 10분이었다. 현지인 분들이라면 충분히 환불을 하러 가셨을 것 같지만, 나는 기차가 오기 30분 전부터 플랫폼 앞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차는 40분 정도가 연착되었다. 충분히 예매소에 갔다올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처리를 하는 사이에 혹시나 출발할까 너무 쫄렸다. 그렇게 내 400루피는 날라갔다.
이제 까지 탄 기차는 모두 어퍼배드였다. 그래서 그런지 로워배드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보였다. 나도 허리를 수직으로 필 수 있는 자리에 앉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오디사행 기차는 로워배드를 끊었다.
이건 다 내 착각이었다. 인도에서는 암묵적으로 밤 8시 이전 까지는 모두 로워 배드를 공유해서 앉아서 가고, 그 이후에는 중간침대를 펴고 누워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이 기차에서 알 수 있었다.
몸살기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서, 누워서 가고 싶었는데 결국 8시까지는 앉아서 가야했다. 물론 내 자리가 아닌 어퍼배드를 양해를 하고 빌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너무 쫄보였다. 분명히 흔쾌이 바꿔 줬을 텐데 말이다.
가지고 온 아스피린을 입에 넣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열은 조금 내려가도 목은 계속 부어있었다. 내 앞에 있는 친구들은 시도떄도 없이 말을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한이 점점 심해졌다. 가지고 온 옷을 껴입고 팔짱을 낀 채 시간을 보냈다.
앓고 있는 나의 시야 왼쪽에서 진물이 가득한 무엇인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 세 모녀가 구걸 중이었는데, 막내의 오른손을 진물이 난 것처럼 투명한 크림과 검정색 화장품으로 꾸며 논 것이었다.
첫째 아이는 약 상자 같은 것을 꺼내서 그것을 사야 한다며 돈을 걷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중, 특히 내 앞에서 상자와 막내의 손을 내 앞에 들이 대었다. 딱 봐도, 사기 행각인 것이 보였지만, 얼른 보내기 위해서 주머니에 있던 10루피를 줬다.
내가 있던 칸에서는 나 밖에 돈을 주지 않았었다. 다들 꺼려하는 분위기에 내가 돈을 주니, 아이들은 더 나에게 엉겨 붙어왔다. 이어서 막내는 나의 팔뚝을 붙잡았다.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이러다 이상한 병이 옮으면 어쩌나 생각도 들었다. 끝끝내 돈을 꺼내지 않는 나에게, 첫째는 나의 볼을 때렸다. 아이의 작고 차가운 손은 아프진 않았지만, 어벙벙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행동을 보고 소리를 지르니, 그제서야 세 모녀는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간 이후에도 기분이 영찜찜해, 아이가 잡았던 나의 팔뚝을 물과 휴지를 이용해 닦았다. 닦은 이후에도 막내의 진물이 흐르는 오른 팔이 계속 기억에 남았다.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 좋은 컨디션과 기분이 겹쳐졌다. 내 눈은 살아 있는 것은 좋아했지만, 썩어가고 병들어 가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나의 몸이 늙어가고, 내 몸의 일부분이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나 조차도 싫어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가서야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새벽 네 시 반이 되어서야 부바스와네르 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이 시간에는 시내로 이동해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너무 아팠다. 목은 나아졌지만, 열은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숙소를 찾으려 부바스와네르를 검색하니, 한글로 된 자료가 몇 개 올라왔다. 그 홈페이지에는 부바스와네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뿌리라는 휴양지가 소개되어 있었다. 이곳을 소개해 준 친구가 말 해준 곳이었다. 일단 나아야 갰다는 생각에, 블로그에 소개된 산타나롯지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뿌리로 가는 기차는 자주 있었다. 2시간 정도를 기다린 후,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여덟시 반 쯤 도착한 뿌리의 햇빛은 강하지 않았지만,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롯지는 기차역에서 걸어서 20~3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이 정도 거리는 보통이라면 걸어가는 거리였지만, 이번에는 계속 나를 따라오시는 사이클릭샤 아저씨에게 몸을 맡겼다.
3분 정도를 탔는데, 너무 불편했다. 내 몸도 힘든데, 낑낑대며 페달을 밟으시는 아저씨 모습을 보니 더 힘들었다. 그래서 3분 정도를 타다, 원래 협상한 50루피를 드리고 걸어서 롯지로 향했다.
골목 길 사이에 있는 산타나롯지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올드산타나(?)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내부, 외부 모두 리모델링 중이었는데 멀리서 봐도 멀끔해 보였다.
다른 외국인들도 있긴 하지만, 특히 일본인들이 뿌리를 많이 찾는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블로그에 소개된 산타나롯지의 손님의 대부분도 일본인이라고 소개하였다.
드디어 찾은 산타나롯지의 문은 닫혀 있었다. 혹시 영업을 하지 않나 조마조마했지만, 나의 똑똑 소리에 인도인 매니저 한 분이 나와 주셨다. 인사를 나눈 뒤, 1층의 로비 소파에 나를 앉히셨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리라며 일본인 매니저 미카를 불러왔다. 내가 일본인인 줄 안 것 같았다.
미카는 자신이 여기서 6개월 간 일했지만, 일본인 말고 한국인은 처음이라면서 반가워하였다. 대략의 머무를 일 수를 말하고, 미카의 안내를 받아 방 배정과, 기차, 마날리로 가는 버스편을 예약을 한 뒤, 밥을 먹었다. 밥 맛은 전혀 없었지만, 먹어야 나을 수 있는 힘도 생길 것 같았다. 억지로 밥과 아스피린을 배 속에 집어넣고, 잠을 청했다.
3일 동안은 이 상황의 반복이었다. 열, 콧물, 오한... 괜찮아질 것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밖에서는 가네샤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네샤가 서 있는 단상 앞에 사람이 없는 새벽에도, 신을 위한 노래는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개들도 그 위에 화음을 더해 주었다.
3일이 지났지만 몸은 쉽게 원상태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어제는 숙소 앞의 약국에서 증상을 말하고 약을 사서 먹었지만, 그걸 먹으니 팔등에서는 하얀 반점이 생겨서 먹기를 그만 두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약 때문에 생긴 것 같았다. 며칠 후에 사라지긴 했지만, 식겁한 순간이었다. 인도의 약이 싸고 괜찮다고 듣긴 했지만, 정확한 처방 없이 약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도 하였다. 만약 다음에 온다면 되도록 감기약은 다 구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은 피곤했지만, 더 누워 있는 것도 지겨워졌다. 근처의 볼 것이라도 있나 미카에게 물어보니, 뿌리의 불교사원과 자가나스, 코나락 사원을 추전해줬다. 그래서 천천히 걸어서 그곳들에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인도 사람들이 신을 모시는 곳에서는 항상 꽃이 있었다. 나도 그곳들에 가기 전에 꽃을 사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꽃이라도 바쳐서 좀 나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살 마음이 없을 때는 그렇게 많던 꽃집은, 살려고 하니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다. 사원 근처에서 40분 정도를 돌아다녔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다. 그냥 꽃말고 과일이나 과자를 사갈까 생각도 들었지만, 아픈 것도 짜증난데, 사고 싶은 꽃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오기가 생겼다. 결국에는 30분 정도가 더 걸려서 꽃을 살 수 있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뿌리의 일본식 불교 사찰이었다. 특이 했던 점은, 1층에서는 사람들이 석상이나 목각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불상보다는 힌두교의 신들을 조각하시는 분이 더 많았다는 점이였다.
상황을 보니, 이곳에 오시는 인도인 분들은 불교를 믿어서 온다기 보다는 다른 힌두교 신의 사원처럼, 성자에게 소원을 비는 곳이라는 성격이 강해보였다. 내가 있는 동안도 많은 인도인 분들이 이곳에 왔는데, 공통적인 행동은 동전을 던지시고 소원을 비시는 것이였다. 아마 이분들이 주 고객 대상인 것 같았다.
사원 내부는 일본에서 오신 노스님의 사진 하나가 불상아래에 놓여 있었는데, 돌아가신 것으로 보였다. 또, 더 이상 이곳에는 일본 스님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사람의 왕래가 끊기면서, 일본으로부터의 물리적 지원도 자연스럽게 끊겼을 것이고, 사원을 운영하기 위해서 힌두교의 신들을 조각하신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보통은 법당(불상을 모신)의 문을 닫아 놓고, 밖에서만 볼 수 있게 하지만, 내가 가지고온 꽃을 내밀으니 문을 열어 주셨다. 나에게 꽃을 받아서 불상 앞에 놓으시고 향도 같이 올려주셨다.
가까이서 본 불상과, 일본 스님의 사진 위에는 먼지가 덮여 있었다. 관리하시는 분이 시키는 데로 절 세 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불교 사찰을 뒤로 하고 다음으로 간 곳은 자가나스 사원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사원의 규모는 정말 상당했는데, 뾰족한 지붕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자가나스는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두 개의 큰 눈과 대칭성으로 상징되었다. 내가 보기엔 그냥 올빼리를 닮아 있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에 엄청나게 큰 시장을 지나야 했는데, 그곳에서도 이상한 올빼미 제품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썩 이쁘지는 않은 모양새였다.
구경하며 걷다보니, 금방 사원 앞에까지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이곳은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었다. 오직 힌두교신자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며, 들어가려는 나를 경비원이 막아섰다.
물론 힌두교 신자가 아닌 것은 맞지만, 그 사람들이 내가 힌두교 신자가 아니라고 내미는 증거는 나의 피부색이었다. 그래서 나를 막았던 경비원이 없는 쪽으로 가서 다시 줄을 섰다. 나에게 또 뭐라하는 경비원에게 “나도 힌두교를 믿어요. 나는 비슈누를 믿어요. 한국의 청년 힌두교 단체에서 왔어요.”라고 되지도 않는 구라를 쳐봤지만, 내 피부색으로는 입장이 불가능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사원 주위를 돌아봤지만, 모든 입구는 경비원 아니면 군인들이 막아서고 있었다. 뭐, 들어갔으면 내가 더 찜찜했었을 것 같긴 했다. 오기로 한 거짓말이었지만, 나의 거짓말로 인한 행동이 어쨌든 그들의 신앙을 믿는 감성에 상처줄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에는 변명할 수 없었기에.
인도에 온 여행객분들, 인도인 대부분 슬리퍼나 샌들을 신고 다니셨다. 물론 운동화를 신고 다니시는 분들도 몇몇 있었다.
나는 그 중, 왠지 가죽으로 된 슬리퍼를 신고 다니시는 인도인들이 정말 멋있어보였다. 그것도 새것 말고 약간 낡고 해진 느낌의 슬리퍼에 자꾸 눈이 갔다.
한국에서는 거의 슬리퍼를 신지 않았다. 신더라도, 쪼리는 절대 신지 않았다. 한번 씩 친구 쪼리를 신을 때마다 엄지 발가락 사이에서 고무가 움직이면서 발에 상쳐를 낸 적이 많았었다.
그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음에도, 나도 저렇게 된 걸 신으면 뭔가 멋있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가죽으로 된 쪼리 하나를 샀다. 물론 핑계는 확실했다. 이곳으로 오면서 샌달이 약간 찢어졌다는 이유에서 였다. 계속 신을 수 있는 수준 이였지만, 샌달 위의 조그만한 균열을 시작으로, 나는 이미 신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버렸었다.
이 슬리퍼를 산 이후로, 근 20일 동안은 엄지발가락이 고통을 받아야 했고, 그다지 생각한대로 멋있지도 않았고, 발만 더 꼬질꼬질 해지게 된 결과만을 얻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사지 말았어야 했다. 그 슬리퍼는.
날이 더욱 뜨거워져서, 코나락 사원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다시 산타나롯지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새 슬리퍼를 산 뒤, 해안가를 따라 길을 걸었다. 해안가는 이상했다. 사람들이 놀고 있는 곳에는 쓰레기가 그나마 없었지만, 사람들이 적어질수록 해변가에는 쓰레기가 많아졌다. 바닷바람을 맞으니 그래도 뭔가 뻥 뚫리는 듯했다. 이 바람을 타고 아픈 것도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뜨거운 오후가 지나가길 기다리면 다시 잠을 잤다. 해가 진 후, 차가워진 옥상의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서 몸을 식혔다. 밖의 사람들은 밤마다 축제 중이었다. 축제를 구경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바다 위에는 달이 떠 있었다. 바다는 낯보다 밤에 달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것 같았다. 낮에 햇빛을 받고 뽐내던 것들은 밤이 되자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혼자 빛나고 있는 것은 바다였다. 달빛을 받고나서야 본래의 색을 찾은 듯 했다.
숙소 앞의 흙으로된 대로에는 양 옆으로 여러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엄마가 수선 집을 해서 그런지, 엄마 가게에 있는 미싱보다 훨씬 오래되 보이는 미싱들을 눈에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저씨가 나를 부르셨다.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니 자리를 내어 주시면서, “꾸르따”를 한 번 맞춰보면 어떻겠냐고 권해주셨다. 꾸르따는 인도에서 남녀 모두 입는 옷으로 셔츠랑 비슷하긴 하지만, 상의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이었다.
원하는 색깔로도 맞춰주신다고 하셨고, 가격도 600루피에 다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 정도 가격이면 기성복을 사는 것이나 비슷해 보여 아저씨에게 위는 진한 파랑, 아래는 회색으로 부탁을 드렸다.
이 옷은 다음 목적지였던 다람살라에서 있는 달라이라마 스님의 법회에 입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인도인 분들도, 일본 투숙객들도 미카를 “미카짱”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냥 “미카”라고 불렀다. 짱이라는 던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였던 것 같다. 미카는 딸과 같이 뿌리에서 머무르며 산타나롯지에서 매니저 일을 하고 있었다. 자주 투숙객이 머무는 3층의 휴게실에 올라와 다른 일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미카와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별 다르게 한 것은 없었다. 갑자기 둘 만 남은 상황이 어색하여서, 미카의 딸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다.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아마 싱글맘인 것 같았다. 딸은 10살(?)정도 되어 보였는데, 뿌리에서 인도 친구들과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하였다. 딸의 교육에 대한 걱정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괜한 오지랖에, 나중에 딸이 엄마에게 엄청 고마워 할 것이라고, 그리고 엄청나게 성장중인 인도에서 유년기를 보낸다면 힌디어, 영어, 일본어 모두 배울 수 있고, 또 인도친구들과 진짜 우정을 만들 수 있다고도 말을 보탰다. 어쩌면 나중에 딸이 인도와 일본 사이를 잇는 중요한 사람이 돼 있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써 남는 것들이 추억이 되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일상은 기억해야 하지만 여행 속에서는 추억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것을 알려준 사람이 리나였다.
리나와 대화를 나눈 것은 정확히 4문장 이었다. 빨래를 하고, 뒤늦게 날씨를 확인하니, 새벽에 비가 올 수 있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빨래는 안에나 널고 있었는데, 리나가 밖에다 빨래를 널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비가 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 라고 말하니 “정말?” “확실하지는 않은데 올 수도 있다고 떠있어!” “고마워!”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찍 부바네스와르의 유적지를 가기 위해서 6시쯤 숙소를 나서다가 운동을 하고 있는 리나와 다시 마주쳤다. “어제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벌써 떠나는거야?” “아니 오늘 부바스와네르 구경!” “아 좋은 하루 보네” “너도!” 이게 끝이었다.
탐방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떄, 내방의 의자 위에 짧은 편지와 함께 5엔이 놓여져 있었다. 5엔은 일본어로 “고엔”으로 발음되는데 행운을 빈다는 뜻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알고보니, 그 날 리나가 에티오피라로 떠나며 남기고 간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전 날 새벽에는 비도 오지 않아서, 결국에 나는 틀린 정보를 말해준 것밖에 없었다.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한 나의 틀린 두 문장을 리나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준 덕분에, 좋은 추억을 그녀에게 받은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그녀의 감사함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