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 : 오디사 편
아쇼카 왕은 인도의 마우리야 왕조의 왕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도의 수 많은 나라들을 정복해나갔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당시의 칼링가(오디사) 지방은 강력한 군대를 가진 독립 왕국이었다고 하는데, 아쇼카 왕에게는 전인도 통일을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공략해야할 지역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전쟁을 이김으로써 통일의 대업은 끝이 났다.
통일 이후, 아쇼카왕은 “법에 의한 통치”를 내세워 각 지역의 큰 바위와 석주에 통치 법칙을 새겨 놓았는데 이것을 아쇼카왕의 14장 마애법칙이라고 부른다.
이 마애법칙은 다르마에 근거한 시정방침을 나타낸 것으로서, 그 가운데 13장은 아쇼카왕이 힘의 정치로부터 다르마의 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칼링가 전쟁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치세 8년이 되는 해에 아쇼카왕은 지금의 오릿사 주에 위치한 칼링가 지방을 정복했다.
이때 “15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그곳에서(다른 곳으로 이송되어 10만명이) 살해되었으며, 그 몇 배가 되는 사람이 전쟁으로 사망했다. 이제 칼링가는 정복되었으나, 그 이후 하늘로부터 사랑받는 자(아쇼카 왕)는 열심히 다르마를 공경하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칼링가를 정복했을 때 느낀 ‘하늘로부터 사랑받는 자’의 뉘우침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아쇼카왕은 당시에 목격했던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슬퍼하여 이때까지의 무력에 의한 정치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참된 정복과 정치란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르마에 의한 정복’(다르마 비자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자신의 모든 영토에서 다르마가 잘 준수되어 현세에는 기쁨을, 그리고 내세에는 안락을 가져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하며, “나느 여러 왕자와 여러 손자들이 또다시 무력에 의한 정복을 감행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르마에 의한 정복만이 진정한 정복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하여”이 법칙을 새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대수롭지 않은 표현이지만, 이 법칙에 담겨진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아쇼카왕과 불교에 관해서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아쇼카왕의 다르마란 불교에 고무되어 그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틀을 넘어서 만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정치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르마의 선포는 반드시 불교 자체의 선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인 법의 존재를 구체적적인 정치의 장에서 처음으로 인도에 가르치는 계기가 된 것은 불교였다.
불타의 세계, 나까무라 하지메
산타나 롯지에서 버스 정류장까지는 약 40분이 걸렸다. 한 10분 정도쯤 걸었을 때,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을까 해서 손을 흔들어 보았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차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아저씨가 영어는 하지 못하셨지만, 다행히 나의 짧은 힌디어를 용케 알아들으시고 버스 정류장 앞에 내려주셨다.
내리자마자, 부바스와네르로 막 출발하는 버스에 탈 수 있었다. 가격은 70루피 정도 였다. 내가 첫 번째로 가야할 곳은 다울리라는 곳이였다. 지도 상에서 부바스와네르 도시에서 살짝 아래에 위치한 곳이였다. 점장에게 표를 끊을 때, 다울리에 간다고 이야기 하니, 그 근처에서 나를 불러서 내려주셨다.
다울리의 대탑까지 가기 위해서는 큰 도로에서 약 20분 정도를 다시 걸어야 가야 했다. 내가 내리자마자 한 릭샤 아저씨가 오셔서 100루피에 탑까지 데려다 주시겠다고 말하셨다. 100루피가 정말 터무니 없는 가격인 것은 알았지만, 선택권이 없어 그냥 100루피를 주고 탑 근처까지 올라갔다.
처음 보는 하얀 색 탑이 정말 예뻤다. 또 아침의 신선한 공기까지 있어 산뜻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탑에서는 칼링가 전쟁으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로 인해 피로 물들었다던 다야강이 바로 보였다. 강을 보고 상상을 하니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수많은 전쟁을 했던 왕은 왜 이제야 전쟁의 참혹함을 볼 수 있었을까? 이 전쟁 뿐만 아니라, 그 전의 전쟁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이 생겼다.
아쇼카왕은 여러 종류의 법칙문을 세겼다고 한다. 석주에도 새기고, 바위 위에도 새겼으며 장소에 따라서도 부처님의 생애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곳에도 특별히 아쇼카석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근본 8탑 속의 사리들을 다시 꺼내서 8만 4천개의 탑을 다시 만들어 공양했다고 전해진다. 이외의 중요한 역할로는, 주변 국에 전법사를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했다고 한다. 이러한 석주, 바위, 탑, 기록들은 후대의 역사연구가들이 유적지를 발굴하고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는데 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먼저 아쇼카 왕이 남긴 마애법칙의 전반적인 내용에 관한 글을 발췌했다.
그러나, 정비된 관료 조직과 강력한 군대만으로 이 광대한 영토의 참다운 통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종과 언어, 또 생활 문화의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인 정치 이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만인에게 타당한 것이어야 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바로 아쇼카왕의 다르마였던 것이다.
무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귀의에의한 정치도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아르타 샤스트라가 기술해 놓고 있다. 이 책은 정복에 3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탐욕스러운 정복자’, ‘흉폭한 정복자’와 함께 ‘다르마에 의한 정복자’를 말하고서, 마지막 것이야말로 만인이 마음으로부터 귀의할 수 있는 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아르타 샤스트라에서 말하는 다라마와 아쇼카왕의 다르마가 그 내용에 있어서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 아르타 샤스트라 : 공공행정과 경제 정책, 군사저력에 관한 보고서로, 아쇼카 왕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의 스승인 카우틸랴와 비쉬누굽타에 의해 쓰여졌다.
여러 종류의 법칙문에 새겨진 내용을 종합해 보면, 아쇼카왕의 다르마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 3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 상처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이 사상의 근본정신은 일반 생물에 대한 자비심으로서 아쇼카와의 무력부정도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동시에 바라문들이 행하는 공희 의례에 대한 비판도 이와 가은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한 개의 법칙에는 종래 식용으로 무수한 조수가 살육되었는데, 이제부터는 하루에 3마리로 제한하고, 장차는 이것도 못 죽이게 한다는 것을 왕이 친히 말하고 있다.
둘째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내용으로서 양친, 장로 , 스승에 대한 순종과 종교인에 대한 보시와 존경, 그리고 친구와의 바른 관계 및 극빈자와 하인에 대한 바른 대우 등이 그것이다.
셋째는, 국민 개개인의 자기 규제 윤리로서 자비, 유화, 자제, 보은, 분에 맞는 생활, 신앙과 다르마에 대한 존경 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아쇼카왕의 다르마가 왕 자신의 불교 신앙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라마의 선포가 불교 자체의 선포로 이해돼서는 안 될 것이다.
아쇼카왕의 다르마는 불교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느 특정 종파의 틀을 넘어선 이념인 것이며, 따서 만인에게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진실과 인간의 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불타의 세계, 나까무라 하지메
즉위 20년이 되던 해에, 아쇼카왕은 직접 부처님과 연관된 지역을 찾아 다니고, 자신이 이곳에 방문했음을 기록한 석주를 남겼다고한다. 그 중 룸비니에 있는 석주의 내용을 발췌했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빠야다시(아쇼카 왕의 다른이름)’왕은 즉위를 한지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참배하였다.
이곳에서 붓다 샤카무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곳에 위대한 분이 탄생했음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며,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추수세는 생산물의 1/8만을 거둔다.“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
다야강이 보이는 탑에서 내려갈 때에는 릭샤가 한 대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까 버스가 나를 내려준 곳 까지만 가면, 다른 릭샤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려가다가 아쇼카 에딕트(Ashok Edict)가 쓰여 있는 표지판을 발견하였다. 다른 것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쇼카 왕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 그 표지판을 따라갔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쇼카 석주와, 아쇼카 왕이 남긴 마애법칙이 쓰여 있는 바위였다. 바위는 어두컴컴해서 멀리에서 보면 그냥 바위 였지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바위에 글자들은 소름이 끼쳤다.
소름이 끼치고 나서야, 왜 소름이 일어났을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2쳔년이라는 새월동안 오래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도 이것보다 더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유물들은 많았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었을까?
마지막 전투였던 칼링가 전쟁을 끝으로 그는 인도를 재패한 전륜성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교에 귀의를 하게 된 것은 우연인가? 통일 당시의 막강한 권력과 무력을 가진 그가 어째서 평화를 지향하는 불교에 귀의할 수 있었을까? 이 글을 읽고, 만약 미국이나 중국이 전쟁을 일으켜 전 세계를 다 망가트린 뒤, 이“제는 무력에 의한 전쟁은 없다!“라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그런 행동에 진성성을 느끼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나라면.
그러한 행동의 배경에 가능한 두 가지 가정은 첫째, 아마 그는 엄청난 속물이라는 것과 둘째, 정말로 세계 평화를 위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인도 통일 이후 그의 이념을 실천했다라는 것이다.
첫 번째 가정에 의한 행동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첫째, 아쇼카의 모든 행동은 그의 최대 행복을 위한 행동이다.
둘째, 아쇼카는 모든 방면에서 능력이 뛰어났으며, 그의 주변에도 뛰어나고 신뢰가능한 사람들이 많았다.
셋째, 아쇼카는 겁이 많았다.
넷째, 아쇼카는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정복전쟁을 계속 진행한다. 하지만 절대권력과 막대한 부를 얻었음에도, 그의 두려움을 사라지지 않았고 더욱 커져갔다.
다섯째, 똑똑했던 그는, 그가 그의 두려움 없는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해왔던 행동들에 의문을 품었다.
여섯째, 당시의 여러 종교 중, 특히 불교의 가르침에서 힌트를 고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일곱째,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 남에게 정신적·물리적 해를 가하는 이기적행동이 이기적행동이 아님을 깨닫는다.
여덟째, 진정으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은 정신적·물리적 이타적행동임을 깨닫는다.
아홉째, 본인의 행복과 주변사람들의 행복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안 왕은 국민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임을 깨닫는다.
열 째, 인도 통일 이후의 절대무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바위와 석주에 새겨 국민에게 교육한다.
두 번째 가정에 의한 행동은 아래와 같을 것이다.
첫째, 아쇼카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다.
둘째, 아쇼카는 엄청나게 똑똑하고 강했으며, 인복이 많았다.
셋째, 주변 사람들의 최대 행복을 생각한 그는, 그가 다스리는 국민까지 행복하게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넷째, 그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시대 상황이 국민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임을 알았다.
다섯째, 인도 통일 전쟁에 나서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결국 통일을 이룬다.
여섯째, 인도 통일 이후의 절대무력과 권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바위와 석주에 새겨 국민에 교육한다.
내 소설 속에서, 엄청난 전쟁 이후의 평화를 희망하는 두 아쇼카 모두에게 불만은 있지만, 두 번째 아쇼카는 영 이상하다. 평화를 위한 무력은 있을 수 있어도,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전쟁을 감행한 두 번째 아쇼카는 아무리 봐도 위선적이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했다고 말하는 첫 번째 아쇼카가 훨씬 더 입체적인 변화를 보여줘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최소한 그는 그의 광기를 멈추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라고 하니 말이다.
뭐 사실, 위선적이었던 아쇼카든 무엇인가를 깨달았던 아쇼카든 아무래도 상관 없기는 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더 이상 “하지 않음”으로써 보여준 가능성이 오늘날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다울리에서 내려와 간 장소는 우다이기리와 칸다이기리였다. 엘로라와 같은 석굴이라고 친구가 소개를 했는데, 꼭 가보라며 추천을 해줬던 곳이었다.
이동을 위해서는 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다시 릭샤 아저씨와 협상을 해야 했다. 먼저 우버로 대충 가격을 보니 180루피 정도가 떴다. 그래서 150루피 정도에 이동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기하고 계시던 단 한 분의 릭샤 아저씨는 200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시겠다며 못을 박으셨다. 괘씸한 아저씨에게 우버를 보여주며, 우버 불러도 아저씨보다 싸면서 협박을 했더니, 가격이 150루피까지 내려갔다.
타고 가면서, 내가 너무 부끄러웠졌다. 우버로 협박을 하여 50을 깎으려 바득바득 우기는 내 모습이 우스웠다. 아저씨의 씁쓸했던 표정도 계속 눈에 남아있었다. 차라리 깎지 않았다면, 우리 둘 사이에 나눴을 이야기들이 있었을 텐데...
목적지에 도착해서, 죄송함을 덮으려는지 콜라 하나를 사서 아저씨에게 가져다 드렸다. 아저씨의 웃음을 보고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첫 문장은 실망스러웠다는 말로 시작해야겠다. 작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 실태 때문이었다.
두 석굴군은 도로 하나를 두고 가까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두 석굴이 있는 유적지에는 엄청나게 많은 쓰레기가 있었다. 또한 석굴 안은 낙서로 도배되어 있었다. 정말 충격적 이었다. 600루피를 내고 기대하며 들어가서, 그 광경을 보고 입장료에 다시 충격을 받았다. 별로 추천은 못하겠다.
우다이기리의 가장 컸던 석굴 앞에 하얀셔츠와 까만 바지를 입은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엇을 하냐고 물으니, “인도를 깨끗이 프로잭트(Clean India Project)를 유적지에서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몇가지 질문을 더했는데, 이 프로젝트는 지역 대학에서 학생들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했다. 스폰서도 없었다.
내가 본 인도는 이러한 활동들로 전혀 깨끗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차리리 확실한 분리수거 정책과, 쓰레기 봉투 등 도시적인 차원의 기초적인 인프라부터 구축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펙도 되지도 않고, 지원도 되지도 않고, 효과도 미미할 것 같은 활동을 왜 하냐고 물었다. 한 친구가 답했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다만 인도가 깨끗해지길 소망하며, 우리들의 지속적인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분명히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답을 해줬다.
학생들과의 문답을 끝으로 다시 뿌리로 돌아갔다. 돌아가기 위한 버스정류장까지 150루피를 그리고 뿌리로 돌아가는 버스에 50루피를 썼다.
돌아온 지 1시간이 지나고, 밥을 먹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밖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가네샤 축제로 어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노래를 부르며 놀았던 것이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닌 것 같았다.
이내 천막 안에 모셔놨던 엄청나게 큰 가네샤 상이 밖으로 나오고 차에 실렸다. 그리고 스피커를 실은 차가 앞장서더니 야외 클럽이 만들어졌다. 엄청나게 큰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이내 많은 사람들이 클럽용 차 뒤로 모였다. 대부분은 어리고 젊은 남자애들이였다. 가네샤 상을 실을 차가 출발하고, 그 뒤로 클럽용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에 연결된 미러볼과 스프링클러를 따라 사람들은 춤을 추면서 움직였다.
몇 사람은 나에게도 끼어들어 춤을 추길 권유했다. 내 옆에 있던 다이스케는 앞으로 나가서 그 틈에 들어가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나는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엄청나게 빠르고 큰 비트에 맞춰서 10살도 안 돼 보이는 꼬마아이가 형들을 따라 무아지경을 춤을 추면서 움직였다. 묘하게도, 내가 있는 곳에서는 실려 있는 가네사 상이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 오디사에서의 마지막 밤은 진짜 가네샤 축제의 마지막 날과 함께 끝이 났다.
다음 목적지인 보팔로 떠나는 열차의 출발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1시간 일찍 뿌리 역에 도착했지만, 11시가 되어도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역무원에게 물어봐도, 그냥 기다리라고만 하였다. 나만 빼놓고 출발한 것일까 걱정되어, 표를 가지고 몇 번이나 안내원을 찾아갔다가 혼나기만 하였다.
결국 내가 기차를 탄 시간은 오후 5시 정도였다. 2~3시간 연착은 예상했지만, 7시간이 연착되는 것은 완전히 계산 밖의 일이었다. 2~3시간은 완전히 내 기준이었던 것이다.
많은 것을 알려준 이동이었다. 홈페이지에서, 열차마다 연착률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 기차의 평균 연착률은 거의 100%였고, 평균 시간도 300~500분, 많게는 1600분 이었다. 기차가 서로 같은 선로를 이용해야 할 때, 우선도에 따라서 이동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 같았다.
기차를 연 이어서 예매할 경우 중요한 문제였다. 나도 오전 중에 도착하여 산치대탑을 보고 올 계획이었지만, 일정 수정이 필요했다.
슬리퍼 칸이라고 해도 밤바람은 무척 추웠다. 저녁에는 보통 창문을 열고 달리기 때문에 침낭이나 얇은 이불을 덮고 자야만 했다.
하지만 오후의 슬리퍼는 정말 정말 많이 더웠다. 밖도 덥고, 밖에서 들어오는 공기도 덥고, 뜨거워진 철제 기차가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마저 덥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높은 온도에, 목은 점점 빨리 말랐고, 시원했던 물도 40분 정도가 지나면 “덥다”라고 느낄 정도로 데워졌다.
이런 오후의 기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침낭 위에 누우면 너무 덥고, 침상 위에 누워도 땀으로 찐득찐득 해졌다. 먹지 못할 정도의 뜨거운 물을 침상 위와 등에 뿌리고 잠시나마 시원함을 느껴보지만 “그 물은 뿌리는 게 아니라 먹어야 했어.”라며 후회를 했다. 많기만 했던 물파는 아저씨는들도 더위를 피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애만 타갔다.
이런 와중에 기차는 차곡차곡 연착시간을 늘려갔다.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라도 도착한다면 좋겠지만, 예상 도착시간은 저녁 일곱 시쯤이었다. 기적적으로 뻥뻥 뚫리길 기도했지만, 불가능한 것을 알고 있었다.
뜨거운 기차와 엄청난 연착의 콜라보에 괜히 인도 사람들이 미워졌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임을 알면서도 그 당시에는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운 생각을 하는 나도 미웠다.
연착은 확실해졌다. 기분은 더욱 좋지 않아졌다. 다음 기차는 내일인데, 어떻게 기다려야하나, 델리에서 이곳까지 다시 오려면 13시간이 걸려 또 하루가 소요될 텐데... 등 이제 정말 선택을 해야 할 때였다.
마날리행 버스를 하루 늦춰, 이곳에 하루 더 머무르려고 산타나롯지에 전화를 해봤지만 내가 들었던 것은 통화음뿐이었다. 버스 회사에도 내 상황을 하소연 해봤지만 절대 표를 바꿀 수 없다는 확인만 받을 수 있었다. 어찌됐든 내일 아침 기차를 타고 델리로 올라가야만 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이 상황을 반응하고 있을까? 속으로는 짜쯩나 있고, 얼굴은 찌푸러져 있었다. 이건 여행인데,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을까? 다시 여행자가 되어야 겠다. 내가 여행 중에 있음을 계속 기억해야 했다.
선선해진 바람이 도움이 됐는지, 빠르게 상황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일단 어쩔 수 없다.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숙소를 잡고 내일 델리행 기차를 기다리는 것이었고, 보팔은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오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내일 아침 기차는 보팔역에서 6시 쯤 출발 예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린 하비간지 역보다는 보팔 역에서 숙소를 찾는 것이 나았다.
릭샤를 타고 보팔역 근처까지 갔다. 노점에서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 숙소를 잡기 위해 보팔역 주위의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1시간 동안 역 주변의 숙소 10군데 이상을 돌아다녔지만 나를 받아주는 방은 없었다.
분명 방이 있었는데, 나에게만 방을 주지 않았다. 어떤 분은 미안하다고까지 하시니, 분명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좋은 호텔에 가면 들여보내 줄 것 같긴 했지만 숙소에 1,000루피 이상을 쓰고 싶지 않았다. 결국 포기를 하고 다시 역으로 향했다. 영화관이라도 있으면 시간이라도 때울려고 했지만, 9시 정도가 되자 영화관도 문을 닫았다.
돌아가는 길에 샤오미 매장을 발견해서, 10,00 암페어 짜리 보조 배터리를 샀다. 더 이상 배터리 때문에 고생하기 싫었고, 혼자 이동하는 나에게 스마트폰은 너무나 소중한 친구였다. 700루피 정도 하였는데, 사고 나니 마음이 정말 든든했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조 배터리가 내 마음의 여유까지 늘려 준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슬리퍼 클래스 웨이팅 룸에서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다른 인도인들이 하듯이, 나도 침낭을 피고 머리 맡에 가방을 깔았다. 앞에 앉아 계신 분들이 나를 보면서 웃고 계셨다. 여기서 자는 외국인을 처음 보시는 듯 했다.
대합장에는 사용할 수 있는 콘센트가 몇 개 있었다, 나도 입구 근처의 콘센트에서 새로 산 보조 배터리를 충전을 하고 있었다. 누가 가져갈까 힐끔힐끔 확인을 하고 있었는데, 아까 나를 보며 웃으시며 아저씨가 나를 부르셨다. 알고 보니, 아저씨가 내 머리 맡에 있는 콘센트를 쓰고 계셨던 것이었다. 자신은 이제 기차를 타러가니, 가까운 곳에 있는 콘센트를 쓰라고 하셨다.
10시 정도 되는 이른 밤이었지만, 금방 잠이 들었다. 6시쯤 일어났는데, 정말 개운했다. 이제까지 잤던 숙소 중에 가장 좋았다. 뿌리에서부터 약간 남아있던 감기기운도 완전히 사라졌다. 두 번째 노숙도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