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부처님[A.E.5 다람살라와 달라이라마.](2)

인도 불교 유적 순례기 : 다람살라 편

by 노루

다람살라

2018.10.01~10.07


1. 9시 버스가 9시에 캔슬


기분이 싸했다. 진짜 내내 싸했다. 도착하자마 느낀 안 좋은 예감에 매표소에가서 표를 보여주니, 2시간 전에 오라며 나를 돌려 보냈다. 그래서 2시간 전에 가니, 30분 전에 오라고 돌려보냈다. 15분 전에 가니 다시 9시에 오라며 나를 다시 돌려 보냈다. 9시에 가니 차가 캔슬 되어 내일오라며 능청스럽게 말을했다.


정말 짜증이 났지만,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힘이 쫙 빠졌다. 분명 차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면.., 사기꾼들...


그때 성은-유나 부부를 만났다. 내일 오라는 그의 말에 포기하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성은 씨가 강력히 어떻게든 해결을 하라며 항의를 하니 전세가 바뀌었다. 담당자가 나와서, 일단 다음 정류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에서 로컬버스를 타라고 주선을 해주었다.


그럼 우리가 산 티켓은 어쩌냐고 물으니, 다음 버스 정거장에서 바꾸라고 얘기했다. 분명히 개구라였다. 이곳에서 산 버스티켓을 그곳에서 환불해줄리 만무했다. 역시나 성은씨가 무조건 여기에서 바꿔야겠다고 못을 박으니, 그제서야 환불을 해주었다.


그렇게 만디행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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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루의 버스정류장이다. 소님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셨다.


2. 인생 최악의 멀미


*볼보 버스를 타고, 만디에 도착하니 먼저 출발한 다람살라행 로컬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예약한 버스는 볼보 버스였지만, 오늘이라도 가기 위해선 이 버스를 타야 했다. 이곳에서 새벽을 보낼 수는 없었다.


모두 서서갈 처지 였지만, 매너 좋은 인도 남성 한 분이 유나씨에게 자리를 양보해줬다. 나와 성은씨는 배낭을 깔고 바닥에 앉을 수 있었다.


셋 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특히 나는 체한 상태였고, 유나씨와 성은씨도 멀미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다람살라로 가는 버스는 계속 구불구불 한 길의 반복이었다. 초등학교 육학년 처음 탔던 바이킹 이후 최악의 멀미였다. 어디에 토라도 하고 싶었다.


휴게소에서 차가 서자마자 밖으로 나가 헛구역질을 했다. 먹은 게 초콜릿밖에 없어서 그런지 신물 말고는 나오지 않았다. 급한 데로 멀미와 쳇기에 좋은 지압을 하면서 갔다. 잠이라도 잘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새벽 5시 정도가 되어서 드디어 다람살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3. 새벽이 지날 때까지


새벽이 지날 때까지, 버스터미널에서 해를 기다렸다. 성은-유나부부는 마날리에서 같이 만났던 동행들이 이곳으로 먼저 와서 그 분들을 만난다고 하셨다. 내가 달라이 라마 티칭이 있다고 하니, 자신들도 듣고 싶다며 다른 동행들과 함께 티칭을 같이 가자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가니 멕레오드 간즈가 나왔다. 첫째로 해야 할 일은 숙소를 찾는 것이었고, 둘 쨰는 티칭패스를 발급 받는 것이었다.


성은씨의 카카오톡 아이디를 받아 놓고, 알렉시스님 추천을 예약해 놓은 백패커스로 향했다. 먼저 문자와 전화를 했지만 답을 주지 않아서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2주 전에 예약했다고 하더라도, “인도”가 “인도”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배커스의 루프탑에 올라가니 사라가 앉아 있었다. 그녀도 하염없이 매니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나도 방이 없으면 휴게실에서라도 자야겠다는 다짐으로 이곳에서 연락이 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금 다른 친구를 보내겠다며 문자가 왔다. 다행히 도미토리의 창가쪽 침대 한칸을 얻을 수 있었다. 새로 도색을 하고 있어 페인트 냄새가 머리를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이만 하면 나쁘지 않았다. 이동에 이틀을 보낸 몸은 떡이 되어서 침대 위에 쓰러졌다. 아침의 해는 이제 막 올라가고 있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정말 포근했다.


KakaoTalk_20190130_163038105.jpg 무사히 다람살라에 도착해서 셋이 찍은 사진이다.오른쪽이 유나씨, 왼쪽이 성은씨다.


4. 달라이 라마 티칭 준비하기


성은 유나 부부와는 네 시쯤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나는 세시쯤 일어나 먼저 티칭패스를 발급 받으러 갔다. 미리 인터넷으로 등록을 하고 가면, 10루피를 내고 5분 안에 발급이 가능했다.


이번 티칭은 대만의 승려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여는 법회로서 사박 오 일간 진행되었다. 오전 3시간 동안 달라이라마 스님이 법문을 해주셨다. 법회는 9시부터 시작되나, 자리를 맡는 것은 5시 40분부터 가능했다. 선착순 개념이긴 하나, 가보면 벌써 좋은 자리는 이미 무엇인가 깔려있었다.


패스를 발급 받은 후, 성은유나 부부의 발급을 도와주었다. 그 후, 부부의 다른 동행들을 만나 인사를 드린 뒤, 법회를 듣기 위한 라디오를 빌리러 갔다. 법문은 여러 개의 언어로 동시 통역이 되는데, 그것을 듣기 위해서는 라디오가 필요했다. 라디오는 보증금을 내고 빌려 쓴 뒤, 다시 돌려주면 그 보증금을 받을 수 있었다. 나와 성은유나부부는 300루피( 이용료 :150, 보증금 :150)을 주고 라디오를 빌렸다.



5. 말의 바람


다람살라는 우리나라의 상해임시정부처럼, 티벳의 망명정부가 있는 곳이었다. 그것에 대해, 세계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라마 의 거처가 있는 곳이어서, 전 세계의 사람들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에 더해 전세계의 음식도 여기서 맛볼 수 있었다.


새롭게 만난 동행 분 중 하나가 찾은 곳이 일본 식당 “말의 바람? 바람의 말?”이었다. 사람이 엄청 많은 곳이었는데, 된장국이 정말 맛이었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새롭게 만난 여행객들과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성은유나부부와는 마날리에서 먼저 만났다고 하는 것 같았다. 총 4분이었는데 2분은 의류학과 대학생 커플이셨고, 다른 두 분은(두분은 형 동생, 나이가 가장 많으셨다.) 서울에서 각각 옷가게와 타투를 하시는 분들이라고 하셨다.


밥을 먹은 뒤에는, 가장 형들 두 분이 머무는 숙소에서 과일을 나눠 먹고 헤어졌다.



달라이 라마에 대해서는 나도 그 단어만 들어봤지만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달라이 라마가 하나의 칭호라는 것과 전생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곳에 와서 알게되었다. 내가 보았던 위키백과의 내용을 발췌했다.


1642년에 티베트의 주권자가 된 데이픈사 주지의 역대 전생자에 대한 통칭. 티베트의 교화주(敎化主)라는 관음보살의 화신이 전생한 것으로서 민간에서 믿고 있다. 촌카파가 개종한 겔루크파 불교가 급속히 발전해서 종래의 여러 파와 대립하고, 각각 동서의 유력민족과 결탁해서 항쟁했다. 겔파의 저항운동을 조직한 겐둔ㆍ개초의 사망 후, 세력결속의 상징으로서 반대파의 습관에 따라서 전생자(轉生者)가 선출되었다.

이 전생활불소남ㆍ개초는 1578년 청해(靑海)에 가서 몽고의 알탄 한과 만나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받았다. 달라이는 그 이름의 일부 개초(대해(大海))에 대한 몽고어이다. 그가 몽고 포교 중에 사망하자, 겔파는 알탄ㆍ한계의 군사력에 의지해서 그 조카의 아들을 새로운 전생자로 뽑고, 그의 사망 후에는 오이라이트부의 구시 한과 결탁해서 당시의 티베트정부를 멸망시키고, 신전생자인 로산 캐초를 주권자로서 달라이 라마 5세로 하고, 거슬러 올라가서 초대를 추가했다.

5세는 고파 불교의 신봉자로서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말년에 몽고의 지배를 둘러싸고 청조와 대립하였으며, 연애시인인 6세는 청에 납치되어서 도중에 청해에서 사망했다. 청은 그 권위를 부정하고자 하였으나, 민중의 저항으로 부득이하게 그의 전생자가 된 7세를 인정했다. 7세는 말년에 주장대신(駐藏大臣) 살해사건의 처리를 평가받아서 1751년부터 주장대신 감시를 조건으로 정권의 재발족을 허가받았다.

8세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 권력의 독점을 섭정 등에 허용했기 때문에 실권계승의 암투가 계속되어서 9세부터 12세까지의 달라이 라마는 요절하였다. 13세 투프텐 개초는 러시아, 영국과 청조의 외교정책에 농락당하면서 허무하게 독립을 외치면서 망명을 계속하고, 귀국 후 판첸 라마 6세와 대립하여, 후자를 부득이하게 중국망명을 시켰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서, 14세는 1959년 이후 중국과 대립해서 인도로 망명하였다.[3]

달라이 라마 측에서는 티베트의 다른 모든 불교 종파는 달라이 라마를 전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달라이 라마 외에 지도자로는 판첸 라마가 있는데 판첸라마는 종교적으로 달라이라마에 다음 가는 지위에 있다. 겔룩파의 공식적인 지도자는 간덴 트리파(Ganden Tripa,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가 세운 첫 번째 사원 간덴사의 주지)이다. 달라이 라마는 겔룩파가 티베트에 진출한 이래(17세기 중엽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티베트를 차지한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하기까지) 티베트의 통치자였다.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는 몽골의 알탄 칸이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에게 봉헌한 이름인데, 그는 겸손의 의미로 자신의 스승과 그의 스승에게 1대, 2대 달라이라마의 칭호를 올리고 자신은 3대 달라이라마가 되었다. 그 이래로 그 법통을 잇는 모든 화신들에게 사용되고 있다. 몽골어 ‘달라이’는 갸초(Gyatso, 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바다’를 뜻하며, 티베트어 ‘라마’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grub, Drup)’에 해당하는 말로 ‘영적인 스승’이라는 뜻이다. 즉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 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티베트어: Chenrezig)의 화신이라고 믿으며, 달라이 라마가 죽은 뒤에 차기의 달라이 라마가 다시 환생하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의 달라이 라마는 스스로 자신이 깨달은 자라는 것을 천명하지 않고 있다. 특히 텐진 갸초는 1959년 중국의 티베트 통치에 반대하여 인도로 망명하였다.

그 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는 한편 국제 사회에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불교와 밀교에 속한다.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환생을 관리하는 중요한 동반자였지만 현대 들어 판첸 라마가 중국 정부에 근접하면서 두 라마의 거리는 멀어졌다. 결국 지금은 달라이 라마가 지정한 판첸 라마와 중국 정부가 지정한 판첸 라마가 라마교(티베트 불교)의 지도자로 다른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다.


위키백과




6. 티칭


일행들과는 일곱 시 반에 광장에서 만나 움직였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휴대폰을 맡기고 몸과 짐을 수색한 이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작이 1시간이나 남았지만 거의 모든 자리가 차 있었다. 우리들도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어폰을 꼽았다.


먼저 대략적인 평(?)을 이야기 하지만, 애초에 스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법문이기에 용어적으로 이해하기 아주 힘들었다. 또 주제는 작년에 이어 나가르주나의 중론에 관해 법문을 하신다고 하셨다. 내가 조금 알고 있는 용어로는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용어들 때문에 한국어지만 외국어 듣기 평가를 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이 법문을 들으려 인도를 오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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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티칭이 있었던 사원이 있는 곳이다. 스님 반, 신자 반에 반, 관광객 반에 반
KakaoTalk_Moim_7L88sM6EDdZHvod18cNog6cWCjYDpD.jpg 법문을 하신 법당의 외관

7. 달라이 라마 스님과 법문


한 나라의 수장이자 종교적 지도자인 달라이라마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신선했다. 단순한 유명이라면 시끄럽고 번잡스러웠을 그의 등장은 정숙하고 질서 있는 분위기에서 장엄함이 연출되었다.


달라이라마가 등장하기 10분 전부터 “옴마니반메흠”이라는 진언을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외우는 와중에 달라이라마가 사원 앞의 저택에서 나오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 발꿈치를 들었지만, 누군가를 밀거나 다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한 웃음과 제스처로 자신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화답했다.


아래에는 졸지 않을 때 기록해 놓았던 법문들을 정리 해 놓은 것이다.


ㄱ. 종교와 불교


모든 종교들은 수많은 사람들과 생명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살렸다는 점에서 모두 존중받을 만 하다. 그리고 불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더불어 실상을 아는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는 점이 다릅니다.


ㄴ. 상호의존=공성=연기


상호의존 하는 것이 공이고, 상호의존 함으로써 발생된다. 즉 공성은 상호의존이며 이것이 연기이다. 오로지 상호의존 함으로써 이름과 소리가 부여된 것뿐이다.

공성이 상호의존하는 연기임을 알 때, 상호의존 하는 것이기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공하며, 무자성이다. 상호의존으로 인해 독자적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 존재한다는 무명에 가리워 다시 윤회한다.

ㄷ. 어떻게 이 어려운 용수보살의 가르침을 집으로 돌아가 수행할 수 있을까요?


용수보살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수행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유해야한다. 그러면 이해될 것이다. 노력이 필요하다.


ㄹ.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물체가 실제로 비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러한 질문과 생각을 통해 어느 정도까지 깨달을 수 있을까요?


실험을 통해 과학자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까지는 도달 할 수 있겠지만, 나의 견해로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복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ㅁ. 중국불자가 티벳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많은 경전들이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일단 자국어로 써져있는 것을 공부하고 티벳경전과 비교해 봄이 옳다. 굳이 산스크리트어를 배울 필요는 없다.


ㅅ. 복덕과 자량 모두 필요함


부처가 되기 전에 무자성을 볼 수 없다. 되기 이전에는 자성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복덕이 있지 않은 이상 자량을 쌓는다고 하더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ㅇ. 보리심


보리심이란 일체 중생을 중립적으로 보는 마음이다. 그렇다고 일체 중생을 실제로 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자신이 하루에 만나는 30명의 사람들이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때, 그것이 일체 중생을 중립적으로 본다고 할 수 있다.


ㅈ. 붐베이에서의 일화


붐베이에서 세상에 불교(법)이 필요한거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반문을 했다. 종교가 필요한가? 종교는 필요하다. 사랑, 자비, 연민의 가르침을 주기에 생명을 가진 것은 안락함을 추구하는 감각을 가지기에.

ㅊ. 감각의 만족과 괴로움


의식이라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안락만을 추구하며 삶을 영위한다. 오온이 만족되더라도, 괴로움은 끊을 수 없다. 마음의 안락함은 감각적인 충족이 아니다. 의심과 기대로는 이룰 수 없다.


ㅋ. 삶의 목적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을 훌륭한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목적을 상실할 뿐 아니라 이것은 몹시 불쌍하다. 번뇌의 뿌리는 무명이며, 실집은 공성의 지혜다. 공성의 지혜가 보리심과 더불어 깨달음이다.

ㅌ. 부서지다


어릴 때, 어떤 경을 공부하다 “부서지다”라는 단어를 배웠다. 단어를 외우기 힘들었는데, 그래서 그냥 이 경이 “부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2년 전 네팔 스님들을 보니, 그 스님들은 여러 가지 경을 암기하고 계셨다. 나보다 나았다. 여러분도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경은 암기할 필요가 있다.


ㅍ. 내가 없다는 확신


보는 것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생각은 생겨난다. 존재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나타나는 “나”라는 생각은 실재하는가? 나에 대한 이야기가 허상이라는 확신을 해야 한다.


ㅎ. 분별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님

“분별로써 모든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론 중 가장 난해한 부분이었다. 분별로써 모든 것이 만들어진다는 견해는 반드시 단견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생의 불성과 부처의 종성은 결코 다르지 않다.


마지막. 대승, 금강승이 비불설(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님)이냐?

인도의 용수보살이 우리보다 더 잘았을 것이다. 400~500년 후와 2000년 전, 누가 더 잘 알겠는가? 결코 어리석은 분이 아니었다. 그 해석을 믿고, 용수보살을 믿는다.



8. 아이의 과자 나눔


내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자신이 싸오신 빵과 과자를 주위 분들에게 나눠주셨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의 딸도 자신의 가방에 있던 과자 봉지를 꺼내더니, 엄마가 한 것처럼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과자를 권했다. 내 등 뒤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과자를 주라며 한 손 가득 과자를 쥐어줬다.


이 아이가 과자를 주는 모습을 본 날은, 어려운 달라이라마의 가르침보다, 그 소녀의 과자 하나가 나에게 더 큰 인상으로 다가왔었다.


KakaoTalk_Moim_7L88sM6EDdZHvod18cNog6cWCkkUrT.jpg 입구에서 팔고 있는 우유와 빵이다.이걸 사서, 부엌에 가져다주면다른 분들과도 나눌 수 있다.

9. 다람살라와 티벳의 독립


그의 가르침에 티벳에 해방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르침을 줌으로써, 현재 상황을 중립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길러준다. 그리고 다람살라의 거리를 걸으며 만날 수 있는 실종자들의 포스터와 NGO단체의 여러 활동들로부터, 더 크게는 그 도시 자체의 분위기로 티벳의 독립이라는 문제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티벳의 독립문제와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이 만나 ,누가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저절로 알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물리적인 싸움으로 가자면 티벳은 중국에 복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중국은 티벳에 손을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이 티벳에 물리적인 저항을 하지 않는 이상, 중국 역시 티벳을 전쟁이나 군사력을 통해 중국으로 편입 시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모른다, 국제사회의 부정적인 여론을 감당하고도, 티벳을 먹음으로써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계산이 서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일이다.


KakaoTalk_Moim_7L88sM6EDdZHvod18cNog6cWCkoL8R.jpg 곳곳에 실종자에 관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티칭을 들으러 가던 중에 있는 이 표지판은중국이 티벳의 판첸라마를 납치해 갔다는 내용이다.

11. 다람콧에서의 저녁


다람콧은 멕레오드 간즈에서 약 2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있는 하나의 마을이다. 나의 경우는 숙소를 예약 해놨지만, 다른 분들은 예약을 하지 못해서, 티칭이 시작 돌날 부터는 다람 콧으로 올라가야 했다. 첫 번째, 티칭이 있던 날 저녁, 다음날 떠나는 일행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기 위해서 다람콧으로 올라갔다.


다람콧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다시 가장 큰 형이 머물고 있던 방으로 2차를 갔다. 나는 콜라를 샀고, 일행들은 돈을 모아서 럼(?)을 사가셨다.


준비를 하는 동안 시간이 잠깐 떠서, 성은씨가 나의 머리를 깎아줬다. 한 달 동안 더 부룩해진 머리를 말끔하게 짜를 수 있었다. 이발소를 갈 수도 있었겠지만, 면도기나, 이발기를 통해서는 질병이 옮겨갈 수 있어서 그냥 머리를 깎지 않고 갈려고 했지만, 감사하게도 장기 여행 중인 성은시가 이발기기를 가지고 다니셨다.


다른 방에서 의자를 몇 개 더 가져와 둥그렇게 모여 앉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나와 디자인학과 커플은 20대, 성은유나부부는 30대, 옷가게와 타투를 하시는 형들은 40대 셨다. 또 디자이너, 옷가게, 타투이스트, 플로리스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목표로 하시는 분들이었다. 우연히 모였지만, 신기하게도 공통점들을 가지고 계셨다.


이 밑은 기억에 남았던 이야기 주제들을 기록해보았다.


ㄱ. 꿈


의류업게에 들어가려는 커플들에게 형들은 진지하게 다른 일들을 알아보라고 추천해주셨다. 이 분야는 이미 포화상태고, 엄청난 운과 실력이 있는 예외가 되지 않는 이상 바늘구멍보다 더 힘들 거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또 한국에서 기술을 가진 장인을 처주지 않는다고 덧 붙이셨다.


ㄴ. 간지와 개성


“간지”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패션에서의 “간지”가 단순히 허세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간지”는 당시의 유행, 대세, 시선이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패션에서의 “간지와 멋”을 원하는 것은 똑같지만, 이 간지의 기준은 제멋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이야기해주셨다.

유행이 돌고 도는 이유도 간단했다. 다른 옷을 입음으로서 개성을 갖고자 하는 시도는 안타깝게도 개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수준에서는 개성이 될 수 있지만, 유행으로 변하여 몸집이 커지면 곧 그 개성은 더 이상 개성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유행이 바뀌면, 옛날 유행들은 점차 조그만 조각들로 나뉘어지고 다시 충분히 작아져 “개성”의 칭호를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ㄷ. 패키징


같은 상품이라도 매장의 패키징, 즉 포장에 의해서 잘 팔릴 수 있다. 즉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는 분위기가, 같은 상품일지라도 차이점을 만들어 내어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ㄹ. 리바이스 구제 청바지


리바이스 청바지를 리폼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라고 한다. 사실상 그 리폼 방법은 옷의 기능을 저해하는 것이지만, 2만 팔로워인 리바이스 청바지 제작자가 리폼을 해서 보여주면 그것이 새로운 “간지”가 된다고 했다.


이야기가 대충 마무린 된 후, 다시 숙소로 내려가려고 했지만 이미 차편은 끊겨 있었다. 걸어서라도 내려가보려고 했지만, 가는 길목에 개들이 꼬리를 흔들며 서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결국은 다시 돌아와, 성은씨 부부 옆방에서 몰래 쪽잠을 잤다. 문에 자물쇠를 해놓지 않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걸리면 어쩌나 긴장이 되긴 했지만, 걸리면 돈을 낼려고 했다고 뻥을 치면 문제 없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몰래 자고 돈을 안내는 것이여서, 해가 뜨자마자 몰래 나와 숙소로 향했다. 무전숙박이라는 범죄긴 했지만, 스릴은 확실히 있었다. 그래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12. 다시 헤어짐


티칭을 듣고, 숙소에서 쉬다 문자를 받았다. 성은씨였다. 이제 막 다람콧에서 출발을 한다는 글이었다. 다람콧에서 버스터미널을 가는 차로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그 길은 맥로오드간즈로 이어져 있어서, 나는 광장으로 향했다.


내려오는 길목에 서서, 인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내려온 팀은 형들이었다. 릭샤 틈으로 보이는 형들에게 인사를 했다. 내가 나와 있어서 놀란 눈치셨다. 차례로 의류학과 커플과 성은유나부부가 릭샤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KakaoTalk_20190130_163037899.jpg 다람콧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타투를 하시는 형이 체하셔서, 지압을 해드렸다.엄청 아파 하셨다.

13. 아이 헤브 어 드림, 티벳 월드


티칭을 받으러 가는 길에 팜플랫 하나를 받았다. 티벳 월드라는 곳에서 티벳 문화에 대한 강연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일행들과 해어진 뒤, 이제 볼 사람도 없던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티벳 월드는 티벳인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일종의 학교로서 티벳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티벳인들의 인도 정착을 돕는 비영리기관이다. 슬로건은 “The world meets Tibet and Tibet meets the world.이다.


티벳 월드는 이곳으로 온 장기 체류 외국인들과 티벳인 사이를 이어서 외국인들에게는 티벳의 문화와 다른 외국어를 배울 기회를 줬고, 티벳인들에게는 영어를 배워 인도의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자력을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기획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탁월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두 번 밖에 참여를 하지 못했지만,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어떻게 탈줄했는지 이야기 하는 것처럼, 티벳을 탈출하신 연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 티벳 승려들을 초청하여서 어떤 방식으로 수행을 하시는 지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여한 날에는, 조금 쉬운 언어로,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셨다.


14. 인도와 티벳


티벳의 난민을 수용하는 결정은 인도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인도의 국민성과, 중국과 맞먹을 수 있는 국력을 가진 인도만이 할 수 있는 티벳 난민 수용은 신의 한 수가 아니였을까?


넓은 땅들 중, 오기도 힘든 산속의 땅을 주고, 자신들의 이념과 국민성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티벳의 불교와 달라이라마로 인하여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물론 인도 자체로도 매력적인 곳이지만)


만약 인도가 티벳의 망명정부을 거부했다면, 인도는 무엇을 잃었을까? 아마 가장 큰 손실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체성이 아니었을까. 큰 나라일수록 여러 개의 주가 연방이 된 국가가 많다. 중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 나라들을 묶을 수 있었던 정서적, 정신적인 결속력을 국가가 스르로 거부하는 행동을 한다면, 스스로의 정당성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서, 인도가 모든 나라로부터의 난민을 수용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결정이든, 그 선택이 국가라는 개념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국민의 정체성의 관점에서 해석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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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걸식


일기를 쓰려고 까페에 앉아 있었다. 점심 즈음이 되니 주홍색 가사를 입으신 승려 한 분이 탁발을 하시려 가게 안으로 들어오셨다.

사장님은 돈을 드리려고 하니, 스님은 돈을 거부하시고 먹을 걸 달라고 하셨다. 사장님은 메뉴판을 가져다 드렸고, 스님은 음식 하나를 추천 받아 고르셨다. 한 1분 쯤 후에, 음식을 하러 들어간 사장님을 다시 부르셔서 물 한잔도 달라고 요구하셨다. 약간의 귀찮다는 표정과 함께 사장님은 음식과 물을 같이 가져다 드렸다.

나는 “와 디게 당당하게 다 요구하신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얻어먹는 주제면 비굴해야한다.”라는 전제가 같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머릿속의 말들이 조금 역겨웠다. 당연히 비굴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왜 나는 그래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던 것일까,

죄송한 마음에, 계산을 하고 나가며 스님의 밥값을 대신 내도되겠냐고 사장님께 양해를 구했다. 사장님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16. 안녕, 다람살라


까페에서 나온 뒤, 숙소에서 짐을 챙겨 맥레오드간즈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다시는 오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되니, 먹어보지 못한 것과 보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았다.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만둣국이 먹고 싶어서, 가게 몇 개를 돌아다니다, 가장 허름해 보이는 만둣집을 찾았다. 양고기 만두였는데, 냄새가 약간 비릿하긴 했어도 고락푸르에서 먹은 햄버거 보다도 맛이 있었다. 티벳 승려 분들도 많이 오시는 곳 같았다.


아직도 버스 시간까지는 4시간 정도가 더 남아 있었다. 오전의 까페에서 정리하지 못한 일기장을 정리하려 다시 카페에가서 일기를 적어 나갔다.


여행은 거의 중반에 다다라 있었다. 약 한 달의 시간이 나에게 더 남아 있었다. 이제 여행에 대한 자신감도 어느 정도 생겼고, 조바심이나 무서운 것도 전보다는 덜했다.


점점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유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왠지 무사히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겠다는 좋은 예감도 들었다. 다람살라를 떠나면서, 생각하지도 못한 이곳에 초대해준 알렉시스님에게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감사했다.


-A.E.6 세 번째 델리 그리고 산치대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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