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유적 순례기 : 마닐라 편
2018.09.28~2018.09.30
두 번째 델리에 도착하여, 해봐야 하는 것은 투어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기존에도 버스는 타왔지만 모두 로컬버스였다. 이번에는 예매한 표를 가지고 약속한 시간에 픽업 포인트로 가야했다. 처음 기차표를 들고 기차를 찾던 것처럼, 이거 놓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릭샤를 잡고 케쉬미리게이트로 향했다.
가는 중에, 인도번호로 전화가 계속 왔지만 무시를 했다. 내가 받지 않아도 계속 전화가 와서, 내가 번호를 줬던 인도 친구겠거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잘 안들리니까, 나중에 전화를 하겠다고 말만하고 다시 전화를 끊었다.
탑승지였던 케쉬미리게이트에 도착하고 나니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Your boarding point is changed."
탑승지 바뀜
“New boarding point is majun katila near church. Bus no 8187."
교회 근처 마주누 카틸라로 오세요. 버스 번호 8187
어이가 없네? 속으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30분 전에 알려주는 것이 어딨나? 열불이났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릭샤에 돈을 또 써야 한다는 것도 정말 싫었다. 하지만, 컴플레인 걸 깡도 체력도 없는 상태였다. 어찌됐든 타려면 이동을 해야 했다.
다행히 버스가 출발하기 15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안도감에 긴장감이 풀렸다. 몸은 땀벅이었고, 발은 씨거맸고, 배는 너무 고팠다.
마날리로 가서 후회한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마날리와 다람살라가 가깝다고 생각한 점, 둘째로 마날리가 폭우에 의해 교통이 복구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점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렇게 오래 이동한 적도 처음이었다. 총 이동 시간은 거의 18시간이었다. 원래는 이렇게 걸릴 정도의 거리가 아니었지만, 차는 3번 정도의 고장남과 수리를 반복하여 우리를 간신히 마날리도 아니고 마날리에서 2시간 떨어진 군루트에 떨어트려주었다.
더 이상 없을 어이도 없었다. 차장에게, 나는 마날리행 티켓을 샀는데 왜 여기에 내려 주냐고 물으니, 갈 수 없는데 나보고 어쩌냐고 도리어 화를 내셨다. 맞는 말이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내 잘못이며, 이 버스를 택한 내 잘못이 맞았다.
마날리까지 가는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큰 버스가 아닌 승용차는 갈 수 있다고 하였다. 버스에서 내린 다른 인도 친구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처럼 보였다. 그 친구들 중 마날리로 향하는 커플 하나를 붙잡아 애원했다. “제발 나 좀 같이 데려가줘, 혼자라서 너무 무서워.” 다행히 나를 버리지 않았다.
그 커플도 버스를 알아보려 했지만, 버스로는 올라갈 수 없다고 하여서 결국 택시를 빌렸다. 택시비는 총 2,100루피 내가 내야할 돈은 700루피였다. 이건 뭐 버스비랑 거의 비슷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머리 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마날리는 가지 말아야 했어...
같이 온 커플은 뉴마날리에서 내리고, 나는 올드 마날리로 가는 길이었다. 마날리에 가까워질수록 차는 점점 막혔다. 다리 하나만 넘으면 바로 올드마날리 였지만, 좁은 다리를 통과하려는 차는 양 쪽으로 줄이 서 있었다.
20분 정도를 서 있었을까, 아저씨도 이건 아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걸어가면 안되겠냐고 나에게 물으셨다.
그래서 나는 다시 애원해야했다. “아저씨 제발 위에까지 데려다 주세요. 저 우산도 없고, 배도 고프고, 감기기운도 있어요. 그리고 지금 여기 정전이라서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에요 :(” 나의 하소연에 아저씨는 10분을 더 기다려 숙소 근처에 데려다 주셨다.
떨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다. 차가워지는 공기와 같이 내 자신감도 같이 땅에 떨어졌다. 원래 추위를 잘 타는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전으로 깜깜한 이곳에서 휴대폰 불빛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다.
사실 누가 잡아먹을 사람도 없었지만, 처음 와보는 장소에서의 어두움과 추움이 나를 계속 겁나게 하였다. 두려움을 누르고 구글에서 검색하여 찾아 놓은 “Cottage Cold Corner"로 향했다.
워낙 구석에 있기도 한 곳이었지만, 구글 맵도 약간 맛이 가긴 했었다. 주인분도 그걸 아는지 숙소로 향하는 표지판이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
사진과 똑같이 생긴 집 앞에서 “헬로! 헬로!”를 외쳤다.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신 모습을 보고서야 긴장이 풀렸다.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먼저 난로가 있는 부엌겸 거실로 데려가 주셨다. 그곳에는 아저씨와 딸과 아들과 딸의 6개월 된 달이 기다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가족들이 먹고 있는 식사를 같이 먹었다. 배가 고팠던 만큼 먹지는 못했다. 오히려 얼마 먹지 못하고 헛배만 찼다. 그래도 음식을 먹은 몸은 난로처럼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안내를 받아 방을 배정 받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은 후 아기를 보러 다시 부엌으로 갔다. 아기의 이름은 아니카(Arnika)다. 아기는 나를 보고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큰 눈이 마르지 않을까 걱정 될 정도였다.
아이가 웃으면 온 가족이 아이를 따라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가족들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 많은 것을 쏟아 부었지만, 가족들이 오히려 많은 것을 받는 것 같았다. 가족들 사이에서의 계산 없는 사랑을 아이는 계산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리고 이 “아니카”라는 특별한 함수가 만들어내는 행복이 공간에 가득 찼다.
나도 잠깐이나마, 그 행복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날씨가 추워 선뜻 침낭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조금 더 웅크리며 시간을 보내다,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떨고 있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가 30분만 기다리면 해가 저쪽에서 뜰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설산이 놓여져 있었다. 아주머니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따뜻한 햇살이 설산을 넘어 집안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해가 뜨자, 아니카는 엄마 품에 안겨 햇살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아침 목욕을 시작했다. 아니카가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하는지, 햇살로 샤워를 하는지, 아니면 아니카가 물과 햇빛을 씻겨주는지 모를 정도로 아니카는 사랑스러웠다.
아니카의 이름은 신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했다. 아니카는 파괴의 여신 칼리의 환생이지만, 칼리와는 다르게 창조를 주관하는 여신이라고 아니카의 삼촌이 설명해줬다.
정말 이곳에서는 여신이었다. 아이의 필요에 따라 가족들은 세상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져와 집을 채운다. 또 자신을 만족시킨 가족들에게 미소와 웃음이라는 축복을 내려주니 말이다.
아침도 가족들과 같이 먹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아주머니가 나에게 “차트니”를 만들라면서 절구 하나를 주셨다. 절구 안에는 허브(쐐기풀)과 사과와 고추가 놓여져 있었다. 마늘처럼 이것을 빻으면 차트니가 된다고 하셨다. 일종의 다대기라고 보면 적절한 것 같다. 여러 조합이 가능하며, 이곳에서는 지천에 깔린 허브에 이곳 특산품이 사과를 이용하여 차트니를 만드신다고 하셨다.
차트니에 관해서 아니카의 삼촌과 얘기를 나눴다, 우리나라에서도 쐐기풀은 많지만 이용은 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인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종류의 식물을 음식과 약초에 이용한다고 이야기 해줬다. 삼촌은 인도에서도 우리나라의 동의보감과 같은 전통 식물이용서가 있으니 알아보라고도 이야기 해줬다.
삼촌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삼촌은 나보다 한 두 살 정도가 많아 보였고, 인도에서 법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법에 관련된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고야프로토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식물을 찾으로 온다고 말을 했다.
*나고야 프로토콜은 자신의 나라에서 나온 생물자원에 대해서는 그 나라가 권리를 갖는 것을 선언한 국제 사회의 법이다. 오늘날에 들어서는 생물에서 추출한 물질로 신약이나 제품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나라의 생물에서 그 생물의 추출물을 이용할 경우 일정 퍼센트 이상의 사용료를 해당 국가에 지불해야 한다는 법이다.
생물다양성이 적은 우리나라에게는 불리하지만, 인도와 중국과 같이 엄청나게 넓은 기후대를 포괄하는 국가에게는 상당히 유리(?)한 규제라고도 볼 수 있다.
밥을 먹은 뒤, 마날리 마실을 나갔다. 올드 마날리에서 뉴마날리로 내려가다 보면 숲이 하나 보인다. 인도의 스위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마날리를 대표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담양의 대나무 숲처럼,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가 수직으로 쭉쭉 뻗어 있었다.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릴 정도로 큰 숲이었다. 짧은 삼림욕을 마친 뒤, 뉴 마날리로 내려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람살라로 가는 버스티켓을 찾는 일이었다. 몇 군데의 여행사를 찾아봤지만, 들을 수 있는 답은 일단 쿨루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저번 주의 폭우로 인해 길이 모두 망가졌고,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길이 복구 될 수 있다고 했다. 사실상 이곳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는 희망은 버려야 했다. 그래서 일단 살 수 있는 쿨루-다람살라 버스티켓을 사놨다. 쿨루까지는 로컬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된다고 하셨다.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 다녔다. 이곳에서도 농구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요상한 주사위 게임으로 도박을 하는 아저씨들도 많았다.
돌아가기 위해서 걷던 중에, 망태기를 드신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곧장 나에게 와서 돈을 요구 하셨다. 잔돈이 없어서 도망가려 했지만, 이 날은 무슨 기분인지 100루피를 드렸다. 주면서도 엄청 망설이고, 주고 나서도 배가 엄청 아프긴 했지만 돈을 받으신 할아버지의 표정이 정말 환해서 기억에 남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니카 생각이 나서 아니카에게 줄 귀덮이 토끼 모자를 하나 샀다. 아직 아니카가 쓰기에는 큰 감이 있었지만, 다가오는 겨울 즈음엔 꼭 맞을 것 같았다.
다행히 아주머니도 기쁘게 선물을 받아주셨다. 저녁을 먹으러 돌아갔다 오니, 모자를 쓴 아니카에 별명이 붙어 있었다. 인도 사람들은 김정은을 “키임저엉”으로 보통 불렀는데, 귀덮이 모자를 쓴 아니카의 모습이 김정은과 닮았다며 아니카를 김정은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상황이 너무 웃겼지만, 그래도 김정은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이름이 나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를 생각하면서 아니카를 부르는 것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모자를 선물하고, 나는 숙소 금방에 마누사원에 다녀왔다. 유명한 곳이라고 하여 가보긴 했지만, 날이 추워서 금방 내려왔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니모와 도하를 만났다.
알고 보니 니모와 도하도 나와 같은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내가 밖으로 마실을 나간 사이에 들어온 것 같았다. 또 우리 모두 26살 동갑내기 들이었다. 배가 막 고프지는 않았지만, 알렉시스님 이후로 처음 만난 한국인들이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밥을 같이 먹으러 모모식당으로 갔다.
도하와 니모는 이곳에서 한 달(?)정도 있었다는 것 같았다. 도하는 그림을 그리고, 니모는 기타를 친다는 것 같았다. 여기에서 요가도 하고, 담배도 피고 등등을 한다고 하였다.
별다른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아니었다. 별 다른 이야기를 할 사이도 아니었기에. 내가 니모와 도하를 신기하게 보는 것보다, 그 둘이 나를 더 신기하게 바라봤다. 왜 유적지를 보고 있는지, 왜 혼자 여행을 하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나도 잘 몰라서 애매하게 대답을 했다. 그렇게 까페에서 차 한 잔을 더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아침을 먹기 전에, 차트니를 빻으면서 아니카의 삼촌과 이야기를 더 했다. 아니카의 삼촌은 “사티그루와 미치고”의 토론에 관해 이야기를 해줬다.
사티구르는 정신적 지도자로, 미치고는 엄청 유명한 과학자로 소개를 했다. 그 둘의 마지막 대화가 너무 웃기다며 나에게 말해줬다.
미치고 “사티그루, 당신의 말은 인정하긴 하지만, 당신은 증거가 필요해요!”
사티그루“난 증거 따윈 필요하지 않아요.”
그렇게 대화는 끝났다.
아침을 먹기 전부터 속이 더 부룩 하긴 했었지만, 아침을 먹고나니 약간 멀미가 날 정도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바로 출발하면 토를 할 것 같아서, 일단 엄지와 검지 사이를 지압하고, 콜라 하나를 사서 먹으며 챗기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20~30분 정도가 지나자, 완전히 풀리진 않았지만, 어지럽지는 않았다.
이제 다시 떠나야 할 떄였다. 배낭을 메고 가족들과 아니카, 도하와 니모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머물렀던 곳중 가장 깨끗하고, 밥도 맛있었던 곳이어서, 떠나기가 정말 아쉬웠다.
어제 쿨루-다람살라 버스를 끊었던 곳에서 로컬버스를 타고 다시 쿨루로 향했다. 도중에 아직도 길이 연결되지 않아, 사람만 건널 수 있는 다리를 건너 다시 다른 버스로 갈아타 쿨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표는 총 70루피가 들었다.
쿨루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챗기와 함께 열이 나기 시작했다. 이놈의 몸이 가장 큰 짐이었다. 또 탈이 날 것 같아, 초콜렛과 해열제만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내 앞의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 동양인 두분이 앉아 계셨지만, 말을 걸어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갈 힘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같은 버스를 타시는 한국인 부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