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산치대탑 편
보팔에 도착한 것은 여섯시 삼십분 이었다. 이곳에서 가야할 유적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산치대탑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알라하바드로 가는 기차는 오후 여섯시 였기에 산치대탑까지는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더라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배낭을 메고 그곳까지 가기는 힘이 들어, 먼저 라커룸을 찾았다. 일정 크기 이상의 역에는 라커룸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가격은 맡길 때 20루피, 찾아갈 때 20루피를 내면 되었다.
이 곳에서 산치를 향하는 버스 정류장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나두라 버스터미널은 저번에 보팔에 왔을 때, 숙소를 찾아 해매던 곳 근처였다. 걸어갈 수 있었지만, 부바스와네르에서 산 가죽 슬리퍼가 아직까지 발에 익지 않아 50루피에 릭샤를 탔다. 다행히 산치로 가는 버스에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2~3시간 정도가 걸린다고 하였다.
탈 때마다 느끼지만, 인도의 버스는 작은 사원 같았다. 언제나 향과 꽃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 탔을 때는, 기사님이 직접 향과 꽃을 사서 버스 유리창 앞에 놓여진 단상 위를 꾸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며 그 위에 10루피를 꽂았다.
버스와 내 옆에 앉으신 아저씨에게서 향 내음이 났다. 향기로웠다. 전혀 나쁜 냄새가 아니었다. 그들은 향기로운데, 그들은 나로부터 어떤 내음을 맡았었을까?
버스는 나 혼자 산치대탑 입구에 똑 떨어트려 주고 제 갈 길을 갔다. 입구 앞의 주황색 꽃을 파는 꽃집에서 꽃을 한 묶음을 사고 입구를 통과했다. 대탑은 입구에서 약 20~3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야 했고, 입구에서 5분정도 떨어진 거리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의 매표소에서 표(600루피)를 사고 박물관을 먼저 방문했다. 작아 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안은 꽤나 넓었다. 또 다른 박물관과는 다르게 신발을 벗어야 했다. 맨발로 걷는 박물관의 바닥은 석상들로부터 나온 모래들로 인해 푸석푸석했다. 박물관 안의 선풍기에도 석상들은 조금씩 깎여나가고 있었다.
여러 전시물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사리불 존자와 목련존자의 사리를 담았던 관의 뚜껑이었다. 뚜껑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 싶겠지마는, 그 위에 적혀 있는 두 분의 약자는 전해져오는 부처님의 이야기와 가르침이 전설이나 설화가 아님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료였다.
두 분의 사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묘한 떨림을 만들었다.
이곳에 스리랑카 사원이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산치대탑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산치는 근처의 마을 이름이다. 고대의 이름은 까까라야 또는 까까나와였다. 그런데 아소카는 왜 붓다의 생애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산치에 거대한 스투파를 세웠을까?
기록에 의하면 아소카 이전에 이미 산치에는 불교의 교세가 확장되어 쩨띠야기리 승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의 불교 역사서인 마하왐사에 의하면, 아소카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중인도를 다스리는 지방 태수에 임명되어 위디샤에 부임하였다. 위디샤는 산치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그 당시에는 위디샤에 지방 수령의 관저가 있었다. 그는 그곳 은행가의 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다. 아들은 웃제니야와 마힌다(Mahinda)이고, 딸은 상가밋따(Sangamitta)이다.
마힌다와 상가밋따는 불교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두 사람으로 인해 오늘날의 남방불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소카의 최초의 아내였던 여인은 독실한 불교도였으며, 그 영향을 받고 자란 마힌다와 상가밋따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스리랑카의 또 다른 불교 역사서인 디빠왐사에 의하면, 마힌다가 전법사로 선택되어 스리랑카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 데위를 만나기 위해 산치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그녀는 쩨띠야기리 승원에서 거의 출가승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곳이 지금의 산치였을 것이다.
BC 272,년에 아소카는 마우리아 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깔링가와의 정복전쟁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보고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 그는 붓다의 사리를 모신 8개의의 사리탑 중 7개의 사리탑에서 사리를 꺼내어 인도 전역에 많은 사리탑을 세웠다. 이때 산치에 붓다의 사리를 모신 대탑과 아소카 석주가 세워졌을 것이다.
아소카는 자신이 과거 태수시절에 아내의 손에 이끌려 가끔 방문했던 곳, 후에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비와 후궁에 둘러싸여 과거의 아내를 잊어버린 것을 보상하기 위해 아내가 거주하고 있는 산치에 거대한 스투파를 세웠을 것이다.
인도 불교 성지순례 가이드, 무념
박물관을 거쳐, 포장도로가 아닌 샛길로 올라가다보면 산치대탑이 조금씩 모습을 들어냈다. 입국에서 표 검사를 받고, 안내서 하나를 받았다. 유적지 내의 동선을 표시 해 놓은 지도 였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처음 만난 것은, 인도의 불교신자 분들이 산치대탑 앞의 큰 나무 아래에서 설명을 듣고 계신 장면이었다. 그들을 지나 산치 대탑과 다른 유적지들을 차례로 둘러 보았다. 사리불, 목련 존자의 사리를 모셨던 탑 이외에도, 3세대 스님들 10분의 사리를 모셔놨다는 탑도 이었다.
동산 위에 펼쳐져 있는 유적의 규모만 보아도, 산치가 당시에 얼마나 크고 중심이 되었던 지역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산치가 보팔보다 도시적 성격이 더 강했었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불교가 잊혀짐으로서, 자연스럽게 이 도시도 사람들과 멀어졌을 것이다.
유적을 한 번 돌아 분뒤,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몇 팀 있었는데, 그 중 꼬맹이 몇 명이 나에게 와서 이것저것 물어왔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여 몇 장 찍어줬지만, 계속 귀찮게 굴어서 자리를 옮겼다.
도망간 곳에서는 한 커플을 만났다. 내가 사촌누나에게 빌려온 사진기를 보고는, 그것으로 사진 한 장을 찍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에게 자신의 메일로 사진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두 분의 사진을 찍어드리고 나도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무엇인가 많이 아쉬웠다. 아쇼카 왕도 이곳에 방문을 했었을까? 그리고 내려가면서 그의 첫 번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을까? 생각을 하다, 입구에서 조금 더 앉아 있었다. 입구에서 바라보는 산치대탑이 아련했다. 나는 여기에 부인도 없는데, 누구에 대한 그리움일까.
꽃을 샀던 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마살라를 곁들인 오이무침을 사먹었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참이었다. 그리고 한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나보고 한국인이냐고 물으신 뒤, 나에게 한국인과 같이 찍은 사진과 그 관광객이 써준 추천 글을 보여 주면서 주변 관광지를 자신이 소개시켜 줄 수 있다고 하셨다. 시간이 없어서 죄송하다고 답하니, 나에게 요즘 한국인들이 왜 오지 않는지에 대해 물으셨다. 2~3전부터 발이 뚝 끊겼다면서 일가리가 없다고 하셨다. 하소연을 듣던 중에, 보팔로 가는 버스가 왔다. 인사를 드린 뒤 버스에 올라탔다.
자리는 만석이었지만, 나를 보고는 차장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감사히 앉아 있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 올라탔다. 자리를 비켜주려고 하니, 아이 엄마와 차장 모두 그냥 자리에 앉으라며 손사례를 쳤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을까? 자리를 양보하려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봤다. 나도 사람들을 쳐다봤다.
알라하바드행 따갈 기차표를 다람살라에서 갔었던 여행사 아저씨에게 부탁을 드렸었다 따깔 기차표는 그 기차 전날에만 풀렸었는데, 아저씨도 자신이 예약을 할 수 있을지 장담을 하시지 못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예약에 성공을 하면 돈을 보내달라고 하셨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SBI 은행을 찾았다. 한국에서처럼 수수료를 내면 다른 은행이라도 돈을 보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다른 은행으로의 송금은 되지 않는다며 푼잡 은행 위치를 가르쳐 주셨다.
구글맵을 검색하여 표시되어 있는 곳을 찾아 갔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도, 묻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 다른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결국에는 더 멀리 떨어진 다른 지점에 찾아갔다.
은행에 들어가, 바로 눈이 마주친 직원분께 도움을 청했다. 이럴 때는 최대한 불쌍하고 친밀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서투른 힌디어로 내 소개와 상황을 말씀드렸다. 그러더니 내가 가지고 있는 송금정보를 보시고 친절히 종이 한 장을 써주셨다. 다른 직원을 가리키면 저 직원에게 가져가라고 하시며, 뭐라고 하면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도 말해주셨다.
덕분에, 처음이자 마지막 인도 은행 송금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수수료는 들지 않았다.
다람살라에서 내려오던 날, 작은 가방 하나를 샀다. 백팩 형태의 작은 가방이었는데, 내 집중 가장 무거웠던 책들을 가방에 옮겨서 다녔다. 내가 지탱해야 하는 무게는 똑같았지만, 뒤에 있는 배낭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앞으로 맨 가방의 무거운 책 덕분에 균형감이 생겼다.
좋아보여서 샀지만, 산 지 2일 만에 가방 끈이 끊어졌다. 그것도 산치대탑을 보는 도중에 끊어져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은행을 다녀온 뒤, 시장의 수선 집을 들렸다. 가방 끈을 고치는 데에는 20루피가 들었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이 내 카메라를 보더니, 포즈를 잡았다. 아이들 사진을 찍고, 그 아이들의 메일 주소도 받았다. 정리를 하면서 보내줘야겠는데, 언제가 될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배가 너무 고파서 시장에 있는 피자집에 곧장 들어갔다. 베스트 메뉴가 뭐냐고 물으니, 저번 주에 캐나다 사람 2명이 와서 4인분이나 먹은 음식이 있다며 그것을 추천해 주셨다.
목이 말라 콜라를 달라고 했더니, 자꾸 콜라를 주지 않으셨다. 콜라가 없는 피자집이 없을 것인데, 내 발음이 이상해서인지 알아듣지를 못하셨다. 그래서 코카콜라라고 다시 말씀을 드렸다. 그러시더니 바로 얼음 잔에 콜라를 가져다 주셨다. 피자는 맛있었지만, 콜라는 왠지 콜라맛이 나지 않았다. 얼음도 조금 꺼리침 해서 결국에는 먹지 않았다.
허기를 채우고, 다음에 찾아갔던 곳은 주스집이었다. 저번에 보팔에 왔을 때, 찾아간 모든 숙소에 거절을 당하고 잠시 쉬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파인애플 주스와, 아이스 라씨를 먹었다. 엄청 달긴했지만, 바라나시를 포함해서 먹었던 라씨 중, 이곳이 가장 맛있었다.
알라하바드로가는 기차 안, 아침에 아팠던 발가락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부바네스와르에서 샀던 가죽 쪼리는 보팔에 와서야 길들여졌다.
내가 신발을 길들였기보다는 내 발이 이 슬리퍼에 길들여졌다는 것이 맞았다. 엄지발가락 사이의 상처 위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더 이상 반창고도 필요 없었다.
나와 인도도 그랬다. 보팔까지 와서야, 인도에 대해 어느정도 굳은 살이 생겨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느꼈던 불안감을 이제 없었다. 인도가 나를 길들였다.
안녕, 부처님은 I.E.-E-A.E. 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이번 편이 A.E.의 마지막입니다.
시간 흐름은, A.E.-I.E-E로 진행되어, 읽기에 더 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