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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Sep 05. 2024

어디에 있기에 아까운 누군가의 능력 따위는 없다

순례길 Day 23 Riego de Ambrós

오르막길이 이어질 하루가 시작되었다. 순례길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부엔 까미노’ 앱에서는 모든 길의 고도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메세타 평원 지역을 뒤로하고 앞으로의 길에 크고 작은 산들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나름 마음의 준비랄까. 막상 걸어보면 정말 힘이 들지, 생각보다 괜찮을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 하루를 어느 정도 예상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든든한 위로가 되어준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다가 뒤를 돌아 풍경을 바라보고, 또다시 목 안의 두근거림을 느끼다 보니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있는 바는 순례객들로 붐볐고, 나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순례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메뉴판이 벽이 붙어있었고, 은은한 커피 향과 또 다른 향기가 함께 섞여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아, 도시의 향기! 스페인 산 중턱 시골에서 이런 카페를 만나다니, 너무 익숙해서 낯설었다.

카페 콘 레체, 라테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라테가 아니었다. 매번 밍밍한 그 맛에 의문을 품던 중이었는데,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물을 더해 넣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껏 많은 카페를 방문하면서 딱 한번 라테 다운 커피를 마실 수 있었던 그 억울한 기억에 의문이 풀렸다.

카페에서 다시 채비를 마치고 길을 걷다가 다른 슈퍼에 들렸다. 그저 작은 과자 정도를 사기 위해 들어간 그곳에는 너무나 다양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야무지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공간이었다. 순례객들에게 특히나 필요한 물건들이 아주 작은 사이즈로 정렬되어 있었고, 모든 제품에 가격표 스티커가 꼼꼼히 붙어있었다. 스페인 중소도시에서도 보지 못한 이 ‘야무짐’을 산 중턱 시골에서 보다니! 이 동네는 카페와 슈퍼 모두 누군가 일에 진심인 사람들만 있는 것인가. 오늘도 소소한 놀라움의 연속이다.

꽃밭이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키 큰 나무들은 자취를 감췄고, 차게 부는 바람에 낮은 풀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보라색 꽃이 가득했다. 꽃밭에 목적을 두지 않았고, 그저 걸으며 그곳에 있던 자연을 보게 되는 것. 그 어떤 식물원과 정원보다 매력적인 경험이다.

오늘은 유독 에너지가 부족했다. 경사가 급한 산을 내내 오르니 당연히 힘을 많이 쓸 수밖에. 온전히 내 발로 걸어가며 몸을 움직이는 이 시간 속에서 나의 몸에 대해 더 잘 느끼게 된다. 하루 스트레칭을 안 하면, 마사지를 안 하면, 밥을 좀 적게 먹으면 나의 몸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살면서 이렇게 내 몸을 예민하게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참 새롭다.

산속 마을의 단 하나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내 흐리던 하늘은 알베르게에 짐을 풀자마자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행운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니, 또 다른 행운이 내 앞에 나타난다.

 마트도 없는 마을에 바 하나가 유일하게 있었다. 적당한 음식을 시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한국인에게는 조금 늦은, 스페인 사람에게는 너무 이른 7시 주방 오픈 시간에 맞추어 바에 갔다. 주인이 이제 막 저녁 장사 준비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첫인상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까만색 옷. 더블 버튼의 그 셰프 유니폼은 작은 시골 마을에 대해 내가 가지는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가 음식과 손님을 대하는 그 순간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긍정적, 적극적, 주인의식, 프로정신 그 밖의 모든 에너지가 담긴 단어가 떠오를 만한 사람이었다. 물 한잔을 부탁해도 커다랗고 빠른 동작으로 잔을 집어 얼음을 채운 뒤 활짝 웃는 미소로 나에게 전해준 그런 장면 덕분이었을까. 당연하게도 너무 맛있었던 그 음식 덕분이었을까. 잠시 그가 이 시골에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하던 찰나,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이 시골에 있기에 더 빛나고 멋진 셰프라고 말이다. 어릴 적 종종 들었던 말이 있었다. “그 일을 하기에는 아까운 학벌이다.”, “그곳에 있기에는 아쉬운 인물이다.” 이런 말들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에 항상 말대꾸를 하고 싶었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세상에 그런 기준은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살면서 내내 체화된 말들은 힘이 세다. 그렇게 밖으로부터 들어온 말들이 내 안에서 힘을 쓸 수 없도록 더 집중하며 살아야겠다. 어디에 있기에 아까운 누군가의 능력 따위는 없다. 각자의 삶에서 그곳이 어디든 빛나면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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