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25 Ambasmestas
밝아오는 아침에 길을 걷다 호주에서 온 부부를 만났다. 백발의 부부는 서로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어주며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같은 모양의 가방과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노년에 함께 이 길을 걷는다는 건 참 낭만적인 일이다. 짧지도 쉽지도 않은 길이기에 이 시간을 함께 할 결심은 그들이 보내왔을 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날들이었을지 가늠할 수 있게 했다.
멋진 차를 발견했다. 사실 스페인에서는 자주 발견하는 외향의 차이지만 볼 때마다 나에게는 생경한 탓에 사진을 자주 찍게 된다. 각지고 투박한 모습에 넉넉한 트렁크 공간은 한국에 잘 볼 수 없는 그 매력이 가득하다.
마음에 드는 테라스도 발견했다. 아주 작고 아담한 공간으로 보였는데, 움푹 파인 그 모양과 버터색과 개나리색 그 중간 어딘가의 색감이 나의 취향에 딱 맞았다. 언젠가 ‘나의 무언가’를 가지게 된다면 꼭 이런 색으로 칠해봐야지, 라며 길을 걸었다.
오늘의 길은 고속도로를 따라 난 작은 마을들을 지나치는 여정이었다. 따분할 수도 있을 그 긴 길은 종종 나타나는 흥밋거리들로 무난히 보낼 수 있었다. 바닥에 놓인 커다란 돌 화살표는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하나씩 더해 만들어둔 것 같아 보였다. 나 역시 돌 하나를 더 얹어두고 길을 이어갔다.
화분이 잔뜩 달린 집과 바닥에 앉아 잠을 청하는 고양이 하나, 고양이 둘 그리고 또 고양이.
그렇게 길을 걷다가 무료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빨리 흘려내보고자 오랜만에 팟캐스트를 틀었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주 챙겨 듣던 것인데, 해외에 있으며 영어를 공부한다는 핑계로 멀리 밀어두었던 것이었다.
오늘의 에피소드는 호스트 작가님의 어머님인 이옥선 작가님께서 새롭게 낸 책, ’ 즐거운 어른‘에 대한 것이었다. 70대의 시선으로 다양한 소재들을 새롭고 솔직하게 담아낸 책이었다. 호스트 작가님들의 표현처럼 '맵싸한' 유머가 가득해서 내내 웃음을 터트리게 되었다. 그렇게 콘텐츠를 듣다가 다시는 잊지 못할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의 꿈은 고독사'라는 책의 한 부분에 옥선 작가님은 자신의 유언을 적어두셨는데, 여러 사람들의 요청으로 그 유언을 직접 낭독해주셨다. 그렇게 담담하고 밝은 목소리로 이어진 낭독을 듣고 나는 정말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그 유언이 너무나 새로웠기 때문이다. 새로워서 울어버릴 뻔하다니 그게 무슨 일인가. 뻔한 유언이었다면 그다지 슬프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번 듣고 난 뒤에도 여러 번 반복하여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단 한 부분만이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제사는 지내지 말고 그날 시간이 나면 너희끼리 좋은 장소에 모여서 맛있는 밥을 먹도록 해라, 또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너희 아빠는 꽃 피는 봄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단풍 드는 가을에 떠나면 좋겠네, 그러면 너희는 봄가을 좋은 계절에 만날 수 있을 테니.
어머니의 유언 낭독에 “너무한 거 아닌가요”라며 울먹이는 작가님과 덩달아 나도 울어버렸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라며 틀었던 이 팟캐스트는 순례길에서 나에게 정말 큰 선물을 해 주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목표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그런데 허탈하게도 자리가 없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정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쉽지만 아직 체력이 바닥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다음 마을을 목표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또 다른 마을에 다다르자 눈에 보이는 알베르게에 바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다행히도 자리가 넉넉히 남은 듯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주인은 알베르게에 대해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그렇게 1층을 둘러보던 중, 테라스에 나갔더니 너무 예쁜 그림들이 있었다. 이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순례자들이 하나둘씩 그려두고 간 것이라고 했다. 하얀 벽이 참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한국에 있는 나의 자매님이 좋아하는 거북이도 사진에 담아보았다.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객들의 손길이 이렇게 담겨있는 벽이라니, 이보다 소중한 인테리어가 있을 수 있을까.
베드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과 창들, 감각 있는 테이블과 의자까지 1박에 15유로가 지나치게 저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은 너무 아름다웠다. 예정했던 알베르게에 예약이 다 차서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곳에서 이런 감동을 마주했다. 역시나 여행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큰 기쁨이 찾아온다.
주방과 식사 공간도 멋진 테이블과 소품들로 가득했다. 한편에 놓인 세계 각국의 소스들을 보고 나는 주인장에게 물었다. ”여행을 많이 다니셨나 봐요?” 역시나 그는 세계 곳곳 안 다녀본 곳이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그의 말투, 행동 그리고 깃털을 꼽아 정갈하게 묶은 그 머리에서까지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저녁식사는 채식이었다. 제대로 된 채식을 먹어본 적이 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너무나 흥미롭게 저녁 시간을 기다렸다. 빵과 함께 나온 올리브유, 후추, 소금은 기본적인 것들임에도 심상치 않았다. 도르륵 돌아가는 소금통은 생전 처음 보는 고급스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터로 나온 토마토 수프는 생토마토를 안 먹는 나도 한 그릇 뚝딱 비울 정도로 맛있었다. 물론 이스라엘,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아주 느리게 먹었지만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이어서 나온 메인은 야채 파스타였다. 간이 거의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소금과 후추를 뿌려 먹었다. 구워진 채소와 파스타가 전부였지만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처럼 그 맛은 대단했다.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고 나니 배가 가득 찼다.
순례자들이 잠자리에 드는 9시, 이곳에서는 3층 공간에서 매일 명상을 한다고 했다. 내공이 깊어 보이는 주인장은 철학적인 이야기들로 명상의 시작을 알렸고, 모두 제각기 가장 편한 자세로 앉거나 누워 명상의 시간을 보냈다. 지붕의 모양 그대로 낮은 천장이 그 공간의 특별함을 더해주는 듯했고, 주인장이 누운 곳 위에 난 천창은 낭만적이기에 충분했다. 고단한 몸으로 시도한 명상은 얕고 평화로운 잠으로 이어졌지만, 그 분위기만큼은 나에게 평화를 가득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