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26 La Laguna de Castilla
늦잠을 잤다. 순례길에서 7시에 일어난다면 그건 그 방 안의 모두가 이미 떠나고 마지막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역시나 어제저녁을 함께 먹었던 이들은 모두 길을 떠나고 없었다. 창 밖에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아침의 무엇이 가득했다. 저녁 내내 알베르게 구석구석을 누비던 고양이 퓨리에타는 어디선가 자고 있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길을 나서기 위해 가방을 싸고 있는데, 문득 오늘 왠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었다.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이 갑작스레 떠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 입 밖으로 바로 내뱉었다.
“오늘 왠지 엄청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채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지난주에 지나온 알베르게에서 종종 얼굴을 마주쳤던 아저씨였다. 그는 어제 이곳에 묵지 않았는데, 아침을 먹으러 온 것일까? 알베르게 사장님과 대화하고 있는 그에게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나누는 대화이지만 너무나 친근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자 그는 갑자기 “Seriously?”라고 대답했다. 순례길에 한국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가 8년 전 한국에 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부산에서 1년 동안 영어 선생님으로 일하며 말이다. 그는 아주 귀여운 어린아이들을 오전에 가르쳤고, Crazy 한 10대들을 오후에 가르쳤다고 했다. 점심에 나오는 음식은 그곳의 전담 셰프가 만들어 준 것이었고, 매번 맛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매운 음식도 좋아한단다! 그는 부산에 있는 동안 패러글라이딩 클럽에 가입하여 매주 곳곳을 다녔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기억을 꽤나 좋게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물었다. 그는 호주 사람이라고 대답했고 이번에는 내가 "Seriously?"라고 말했다. (사실 그냥 Really? 하고 놀랐다) 호주 사람이라니! 당장 내가 호주에서 5개월 동안 있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캔버라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호주를 떠난 이후로 종종 호주 영어 발음을 들으면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끼곤 하는데, 그는 호주 특유의 발음이 없었다. "아, 퀸즐랜드에는 bogan이 많아서 그런가 봐"라고 이야기하니 내내 젠틀하고 모던하던 그가 아주 크게 웃어 보였다. 지난주 내내 그를 자주 마주쳤지만 인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아주 우연히 마주쳐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니 아주 반가운 만남이었다. 오늘 가게 될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기쁘게 인사했다.
오늘은 그리 멀리 가지 않는다. 오랜만에 가파른 언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아주 조금 엿보이는 예쁜 정원을 발견했다. 강가에 있는 바이길 바라며 다가갔고, 너무나 예쁜 정원을 발견했다. 곧 자리를 떠나려는 사장님을 붙잡아(은 건 아니고 사장님이 기꺼이 만들어주셨다) 카페 콘레체를 한잔 마셨다. 마치 가평이 떠오르는 고즈넉한 공간이었다. 요즘은 아주 가끔 한국을 생각하며 그립다는 감정이 떠오르곤 한다. 해외생활 6개월째, 드디어 한국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오늘의 햇살이 정말 아름다웠기에 곳곳의 모든 것들이 빛났다. 작은 골목의 소박한 알베르게도 눈을 이끌었고, 그림보다 아름다운 구름도 계속 이어졌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10KM 정도 걸었을까, 길지 않았지만 내내 오르막을 올라왔기에 이온음료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체크인을 하고 바로 내려와 얼음과 함께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샤워를 하고 옷을 빨래하다가 옆 방 크리스티나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스페인 음식을 추천해 주었고, 포르투갈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나누었다. 이렇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에게 참 큰 에너지를 준다.
주방도 마트도 없는 이 마을에서 알베르게에 있는 바는 유일하게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으로 바에서 메뉴 델 디아를 시켜 먹었다. 크리스티나가 추천해 준 갈리시아 지방의 수프를 먹고, 디저트로는 산티아고 케이크를 먹었다. 낯설고 새로운 것들은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 나름의 여행으로 나를 흥미롭게 해 준다. 그래서 새로운 선택은 항상 실망스러울 리 없다.
저녁을 먹기 전 널어두었던 빨래가 벌써 다 말랐다. 3시부터는 정말 뜨거워지는 햇살이 5시에 가까워지면 정말 위험해진다. 그렇게 위험한 햇살은 매일 나의 빨래를 태울 듯 말려버리고, 가벼운 나의 배낭에 아주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