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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Sep 19. 2024

비가 오는 날에도 굳이 야외 테이블에 앉는 이유

순례길 Day 27 Lugo, 28 Sarria

날이 유독 궂은 아침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바로 시작된 산길은 온통 안개 속이었고,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 같던 하늘은 정말 머지않아 비를 뿌렸다. 가방에서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북쪽길에 비가 자주 온다는 말에 데카트론에서 부리나케 산 판초우의가 프랑스길에서도 요긴하게 쓰이다니, 무려 300g이 넘는 그것을 내내 들고 다닌 보람이 크게 다가왔다.

아무리 걸어도 안개는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앞이 보이지 않던 산길을 겨우 벗어난 김에 눈 앞에 보이는 바에 바로 들어갔다. 주로 아침은 출발하기 전에 먹거나, 걸으며 간단히 해결하곤 했었기에 어딘가에 앉아서 아침을 먹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날이 많이 추웠고, 따뜻한 불빛이 들여다보이는 바는 정말 아늑해 보였다.

북적이는 바에는 함께 있는 알베르게에서 나와 이제 막 길을 나서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며칠 전, 길을 걷다 만난 호주 노부부였다. 이른 아침 우연히 들어간 산장 바에서 그들을 만나니 마치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것 마냥 놀라움에 크게 인사했다. 순례길에서는 이렇게 종종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이 참 반갑다.

날은 흐렸지만 다행스럽게도 길은 쉬웠다. 안갯속을 걷다가, 구름을 내려다보다가 걷고 또 걸었고, 판초우의의 차가운 촉감과 왠지 모를 아늑함을 느끼며 시간이 흘렀다.

유독 길에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순례길에서 가장 많이 만난 연령/성별은 50대 이상 남성분들이었는데, 이 아침에는 이상하게도 내 또래 사람들이 줄지어 길을 걷고 있었다.

아침 내내 해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쏟아붓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비와는 다르게 참 차가운 비였다. 점점 더 걷기를 즐기기에는 어려운 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오늘의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쏟아지는 비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지나쳐가는 작은, 골목골목 소똥 반 길 반인 시골마을이었다. 영어 한마디 통하지 않는 주인아주머니가 안내해 준 방은 참 따뜻했다. 길에서 나던 소똥 냄새가 방에서도 났지만, 포근한 침대와 오래된 가구 그리고 무려 욕조에 온수가 콸콸 나오는 욕실은 충만하기 그지없었다. 매일이 알캉스인 요즘, 또 다른 호사가 여기에 있었다.

내내 얼어있던 몸을 욕조에 담그고 나니 세상모르게 낮잠에 들었다. 주인에게 말해둔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 부리나케 식당 층으로 내려갔다. 음식을 내어주는 사장님은 10살이 채 안된 것 같은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이 시골에서 이런 젊은 가족이 살 수 있다니, 순례길에서는 자주 목격하는 내내 놀라운 풍경이다. 풍족한 양의 저녁식사를 하며 내부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브라운관이라고 부를 만한 TV와 세월이 느껴지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여전히 안개 속인 길을 나섰다. 지나는 마을에는 세월이 가늠되지 않는 나무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어두운 날씨에 유독 그 모습이 더 멋있어 보였다.

산길을 지나며 도통 슈퍼를 만나기 힘들어졌다. 이 날도 아침을 먹으러 걷는 길에 만난 바에 들렀다. 아직 차가운 안개가 가득하고, 따뜻한 실내에 깨끗한 테이블이 즐비했지만 굳이 야외 테이블 중 덜 젖은 곳을 골랐다. 바에서 가지고 나온 티슈로 테이블과 의자를 닦고 앉았다. 탁 트인 야외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그 시원함은 번거로움 따위를 아주 작게 느끼도록 해준다.

카페 콘레체는 충분히 따뜻하고 적당히 밍밍했다. 이 맛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지만 이제는 순례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 같다. 유독 바삭하고 맛있는 바케트를 올리브유와 함께 먹고 기분이 참 좋았다. 충분히 바삭하고 적당히 쫀득한 그 식감에 감탄해 가며 보낸 시간이었다. 아침을 다 먹은 뒤, 바게트의 출처까지 알아내어 도매만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빠나테이라에서 커다란 바게트 하나를 더 사고야 말았다. 순례길 중 많은 기억들이 내게 정말 행복한 순간으로 남았지만, 이 날 이 바게트를 사던 그 순간 내 머릿속 기억된 장면들은 참 잊지 못하게 기쁜 한 컷이다.

드디어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걷히고 파란 것이 보이자 카메라를 들지 않을 수 없었나 보다. 이렇게 당연한 것도 없어져보면 그 소중함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깔끔하게 칠해진 외벽에 커다랗게 적힌 알베르게의 이름. 오랜만에 꽤 큰 마을에 왔다. 마을 초입에 있는 오늘의 알베르게는 건물부터 주인까지 '도시'를 느끼게 했다. 왠지 모를 쌀쌀함과 멀끔함은 가끔 서운함을 불러올 때도 있지만, 반짝이고 커다란 슈퍼는 그 공간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시골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아시안 소스를 집어 들고, 신선한 고기와 저렴한 와인을 장바구니에 담아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쌀국수에 고기, 그리고 빛나는 잔디. 완벽한 저녁식사였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순례자 두명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전거로 오늘 산티아고에서 출발해왔다는 이는 전 세계를 여행 다니는 진짜 여행자였다. 놀랍게도 2000년대 초반 한국도 여행을 했었다고 하더라. 내내 자신의 여행과 시간들을 이야기하던 그의 말은 꽤 흥미로웠지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는 그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말들에 자리를 옮길 타이밍을 보고 있던 찰나, 중국인 같아 보이는 젊은 여성분이 대화에 함께하게 되었다. (예상대로 중국인이었기에 자신 있게 기억하는 국적 추측...) 그녀는 눈에 띄게 영어가 유창했고,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막 시작하는 시점이라 옆에 있던 세계여행자와 다양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나는 그녀와 따로 대화를 더 하게 되었다. 유창한 영어는 그녀가 영국에서 16살 때부터 지내왔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호주에서 만난 중국 사람들의 영어와 아주 미세하게 다른 그녀의 발음은 중국식 발음과 영국식 발음 그 중간에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언젠가 중국으로 돌아가 살 것이라고 말했다. 당연하지는 않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계속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다. 영국에서의 직장과 삶의 조건이 조금은 더 나을지라도 자신의 모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느낌, 이방인이 아니라는 그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단순히 가족들과 가까이 살기 위해서가 아닌 것 말이다. 해외에서 잠시동안 삶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올해에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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