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24 Cacabelos
어둠 속에서 산길을 한참 내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충전식 손전등의 배터리가 다 닳아갈 때쯤이면 해가 밝아온다. 그렇게 다다른 마을의 초입에는 아름다운 강이 있었다. 마을마다 있는 작은 성당의 머리가 빼꼼 보이는 그 풍경은 항상 기분이 좋다. 그곳이 오늘의 종착지이던, 그저 지나가는 곳이던 하나씩 할 일을 끝낸 기분이랄까.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서, 조금 더 걸은 뒤 다음 마을의 바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한다. 공복에 이어진 내리막 유산소는 내게 활기를 준다. 한 시간이 넘게 걸어도 굳이 무언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몸이 가벼울 때도 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음에 드는 순간이다.
그렇게 길을 걸으며 또 다른 마을을 지나는데, 눈앞의 건물들이 모두 뿌옇게 가려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비가 올 것만 같이 흐리던 날씨였는데 결국 구름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눈앞에서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빽빽하게 내리고 있었다. 별똥별을 봤을 때만큼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꽤나 큰 도시를 지났다. 아마 성당일 커다랗고 멋진 건물은 습기를 머금어 운치 있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답게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한 구석에는 굳게 닫힌 철문에 강아지 혹은 고양이를 위한 것 같은 작은 구멍이 나있었다. 귀여운 장면이었다.
작고 낮은 플라타너스를 보았다. 이렇게 여린 플라타너스는 처음 보는지라 사뭇 느낌이 새로웠다. 하지만 여전히 이 플라타너스도 내게 학교 후문에서 이어지는 그 커다란 플라타너스 길을 떠올리게 했다. 나의 스물한 살 그 시간의 푸르름이 그대로 내 기억 속에 담겨 있다.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그저 휙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제 막 커피를 마시고 나온 뒤였고, 날이 좋아 계속 걷고 싶었다. 조금 눈에 띄는 건물이었지만 유별나지는 않았으므로 적당히 카메라에 담았다. 핸드폰으로 아주 품질 높은 사진을 손쉽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종종 정말 좋은 부분이다. 다만 그 한 장 한 장의 내 정성은 아쉽지 않을 수 없다.
순례길에서의 햇살은 항상 뒤에서 올라온다. 대낮에는 그 방향에 더 크게 감사하게 되곤 한다.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해가는 종아리도 마음에 들고, 햇빛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하늘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것도 좋다.
오늘은 공립 알베르게로 간다. 오래된 성당 옆에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듯한 곳이라고 했고, 주방시설이나 저녁 제공이 따로 없는 곳이기에 마트에 들러 미리 음식을 샀다. 며칠간 눈독을 들이던 멜론도 과감히 집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야채를 씻고 접시에 음식들을 담으니 꽤 든든한 한상이 차려졌다. 옆자리 앉은 일본인 아저씨들께 이삼일 길에서 마주쳐왔다는 동질감으로 멜론을 나누어드렸다. 반대편에 앉은 50대 여성분께도 한쪽을 잘라 드리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자잘한 주름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맑은 눈과 미소를 가진 사람이었다. 오늘은 어디서부터 걷기 시작했는지, 언제부터 이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등의 순례자 전용 스몰톡으로 반가운 대화를 이어나갔다. 달디단 멜론을 사서 나누어먹는 그 순간이 참 평범하고 아기자기했다.
2024.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