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22 Rabanal del Camino
이건 노을이 아니다. 오전 7시에 느즈막히 잠에서 깨어 알베르게의 테라스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으며 본 일출이다. 올해 일출과 일몰을 자주 보면서 아주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 걸 느꼈다. 구름이 적당히 많이 있을수록 해는 더 예쁘게 뜨고 진다는 것이다. 너무 맑으면 이렇게 다양한 색을 갖지 못한다. 적당한 역경과 고난을 기꺼이 흘려보낼 수 있게 해 줄, 얼마나 소중한 교훈을 얻는 시간인지 참 감사한 하루들이다.
저 멀리 앞에 걷고 있는 순례자의 가방이 눈에 띄었다. 귀여운 인형의 발이 달랑달랑 움직이며 함께 걷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얼굴은 조금 지쳐보였지만 당신의 가방이 참 예쁘다는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위한 여러 물건들이 걷는 내내 내 어깨의 짐이 되어 나를 누르면 뭐든 쉽게 버리게 된다. 버릴 수 있음에 행복하고 신나진다. 그 와중에도 함께 길을 걸어온 저 인형이 참 귀엽고, 버려지지 않았든 버릴 수 없었든 그 마음이 귀해보였다.
작은 마을에서 바에 들려 커피를 마셨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그 곳은 왠지모를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주인 부부가 앉은 테이블 옆에서 나도 햇살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다정하고 일상적인 그들의 대화로부터 나에게도 여유가 다가왔다.
유럽에 오고 나서 매일 놀라운 것은 바로 차들의 생김새이다. 낡거나 오래된 차들이 아주 자주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작은 체구에 넓직한 트렁크를 가지거나 커다란데 이미 범퍼는 없어져버린 그런 차들을 자주 보게 된다. 모두 빛을 잃은 것인지 검은색, 회색 혹은 하얀색에 흠집하나라도 난다면 큰일이 나는, 트렁크에는 일주일 치 장바구니만 넣어도 꽉 찰 것 같은 한국의 흔한 차들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참 다른 생각과 다른 욕망이다.
더운 길을 걷고 걸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게시판에 붙은 여러 사진 속에 행복해보이는 장면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두고두고 소중한 사진이었을 것 같아 보기만해도 웃음이 지어졌다.
아침에 만난 영국 부부도 오늘의 마을에 함께 머무는 듯 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 느껴진 그들의 자유로움과 유연함이 멋있었고, 닮고 싶은 그림으로 기억하기에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추천해준 ‘The Way’라는 순례길 영화도 언젠가 보며 다시 떠올려보려 한다.
오늘의 길에서는 한국인도 한명 더 만났다. 사업을 하다가 적당히 이른 은퇴를 하고 세계여행을 떠나왔다는 그는 내게 오랜만에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꺼낸 말들 중 80%는 나의 걷는 속도가 꽤 좋다는 것이었고, 자신의 걷는 속도가 꽤 빠르다는 것, 그리고 이 길 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는 속도가 어느정도라는 것이었다. 그 짧은 대화에서 나는 다시한번 내가 어떤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야할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3주 넘게 길을 걸으며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그 분 뿐이었다. 올해 2월 한국을 떠나 호주에서 생활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길에서 상대와 비교한 나의 속도에 집중하는 것은 한국인 뿐이다. 물론 모두가 비교는 할 수 있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말할 만큼 스스로 몰두하고 집중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 밖으로 나와 살아보고 싶었던 그 이유를 오랜만에 마주하게 해 준 시간에 오히려 감사한 만남이었다.
2024.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