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웃음을 찾아서
동료들과 코미디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꼭 한 번은 이런 말이 나온다.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게 훨씬 어렵다. 눈물만큼이나 웃음 또한 귀해서,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좋은 코미디를 보고 푸하하 웃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다.
잘 만든 웃음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와 웃음 코드가 잘 맞는다는 건 서로의 취향과 그 관계의 역사가 잘 섞여 우리만 아는 연결고리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 그게 잘 안 맞는 사람들과 함께일 때면 그 어떤 시끌벅적 속에서도 혼자다. 모두가 웃고 있는 와중에 나만 전혀 웃고 있지 않는 상황도 그 반대의 상황도 모두 외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게다가 누군가에겐 코미디가 누군가에겐 아픈 상처라 언제 어떤 표현으로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코미디를 좋아하나? 우선 1차원적 개그가 싫다. 뀌고 싸고 넘어지고, 창작자로서 그런 웃음만을 만드는 건 좀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 바보 만드는 개그도 싫다. 그런 건 대체로 뒷맛이 쓰다. 근데 또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바보 만드는 건 섬세하게 다뤄졌을 때 꽤나 재미있다. 그리고 이왕이면 지적 욕구도 함께 충족되는 코미디면 좋겠다. 99%의 웃음 속에 1%의 페이소스까지 느껴지면 금상첨화. 언제나 100%의 웃음이라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 이 기준에 완전히 어긋난 걸 보고도 어느 날 뜬금없이 웃음이 삐져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코미디라는 건 알면 알수록 복잡하고 어렵다.
오늘 영화 한 편을 봤다. B급 코미디로 소소하게 입소문을 타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는 영화였는데, 최근 OTT에 공개됐다는 소식에 가볍게 보게 되었다. 결과는 대실패. 이 영화의 웃음 코드와 철저히 불화하며 러닝타임을 말 그대로 꾸역꾸역 참아냈다.(혹평이니 영화 제목만은 밝히지는 않겠다. 키워드를 조합하면 알 수 있지만 아무튼.)
이 영화의 웃음 포인트는 대체로 누군가가 죽음에 있었다. 자꾸만 주인공 주위의 사람들이 절묘하게 죽어 나가고, 인상이 험상궂은 두 주인공은 억울한 상황에 처한다. 그러니까 누가 죽으면 나는 웃어야 했다. 그걸 잘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물론 스릴러처럼 잔인하고 자세한 죽음 묘사는 없었다. 그럼에도 과장되게 사방으로 튀는 피를 보며, 사람이 찔리고 갈리는 효과음을 들으며 웃을 재간은 없었다. 어쨌든 피는 피고, 죽음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잘 숨기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신경 쓰이는 나 같은 사람은 끝내 즐기지 못하는 거다. 중간에 실소 몇 번을 제외하고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까지 대체로 무표정으로 영화를 봤다. 실패한 코미디만큼 슬프고 무용한 게 또 없다.
이렇듯 여전히 자주 실패하지만, 우연한 순간 터트리는 개운한 박장대소는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려놓을 만큼 짜릿해서 코미디라는 알 면 알수록 더 모르겠는 이 장르를 계속 좋아할 수밖에는 없다. 언젠가는 끝내주는 코미디를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