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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r 25. 2024

우리 십 년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낭만적인 약속 그 후

2013년, 함께 스웨덴에서 한 시절을 보낸 친구들과 꽤나 낭만적인 약속을 했었다. 우리 10년 후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2023년 7월 15일, 늘 가던 기숙사 동네 슈퍼 앞에서.


약속을 하던 순간의 많은 디테일들은 이미 날아갔지만 이런 생각을 했던 건 확실히 기억난다. 이 약속이 현실이 된다면 나는 그사이 10년을 꽤 잘 산 시간으로 여기게 될 거야.


그때는 눈앞의 십 년이 꽤나 길어 보였다. 약속이 실현되자면, 우선 이들과의 관계가 최소 십 년을 가야 했다. 당시 이십 대 초반의 나에게는 아직 십 년 이상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의 우정은 굳이 따지자면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일찍 밤이 찾아오는 머나먼 타국, 몇 없는 한국인들은 자연스레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몸이 멀어진다면, 혹은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게 된다면, 혹은 그 밖의 미묘하고 작은 이유들로 우리의 연결고리는 언제든 약해질 수 있었다.


스웨덴을 다시 여행할 수 있을 적당한 경제적 여유 또한 필요했다. 한 치 앞의 미래도 안 보이던 대학 시절에, 그런 여유는 젊은 낙관 속에서도 막연하게 느껴졌다.


취기를 빌려 먼 미래를 기약한 아무 말들 중 하나였지만 구체적인 약속은 꽤나 힘이 세서, 십 년 후 우리를 그 비슷한 어딘가로 이끌었다.


뭔가 이런저런 모양이 많이 다르긴 한데, 아무튼 지금 나는 그 약속을 했던 사람들과, 스웨덴이 아닌 태국에, 7월이 아닌 그다음 해 3월에 와있다.


매달 월급날 5만 원 자동이체를 하는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여행 경비는 제법 모였지만, 간과한 건 유럽 여행을 가려면 꽤 긴 휴가가 필요하고 그 긴 휴가를 함께 맞추는 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2023년 7월 15일에 우리는 그냥 한국 자기 집에서 자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할 수는 없다. 10년의 약속을 잊지 않고 뭐라도 기념하기 위해 지금 여섯 시간 비행기를 타고 한국과 스웨덴 사이 어딘가로 날아왔으니까.


꽤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믿었던 그 십 년 후의 우리는 여전히 그냥 우리다. 아직도 팔씨름 같은 걸 하느라 힘을 쓰고, 몸을 한껏 뒤로 꺾어가며 서로 인생 사진을 찍어준다. 하루종일 서로 ‘만약에‘로 시작하는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보낸다.


성격도 취향도 부지런함의 정도도 저마다 다르지만 같이 놀 친구들이 이 사람들밖에 없던 십 년 전 그때처럼 서로를 쉽게 그러려니 한다. 어쨌거나 같이 있으면 재밌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도전은 계속된다. 내년엔 꼭 스웨덴에 갈 것이다. 안되면... 내후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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