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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Apr 15. 2024

촬영 현장의 어린이들

요즘 어린이 배우들을 만날 일이 많아졌다. 주인공 아역이 등장하는 과거 회상 장면들 때문이다. 극 중 시제는 20여 년 전이다. 의욕 넘치는 한 어린이 배우가 즉흥 연기로 '요즘' 아이돌 춤을 추기에 "옛날 춤으로 춰야 하는데?" 했더니, "옛날 춤이요? 그럼 막 2020년 노래 이런 거요?" 하고 대답한다. 듣고 있던 주위 어른 스태프들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우리에게 2020년은 정말 어제 같다. 그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며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여덟 살 아이에게 그 시간은 구체적인 '옛날'이 된다.


아이는 피곤한 어른들 옆에서 지친 기색 없이 종알종알 떠들고, 카메라와 눈을 마주치면 연신 얼굴을 찡긋하며 브이를 그려댄다. 2020년이 '옛날'인 이 아이에게는 매일이 얼마나 밀도 높은 하루일까, 생각하면 재미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처럼 현장의 어린이들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낯선 것들을  마주하고 있을까 생각하면 걱정이 된다. 이 걱정은 특히 엑스트라 어린이 배우들을 볼 때 든다. 그 나이 때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아이들은 자기가 어떤 세상에서 주연도 조연도 아닌 단역 1이라는 걸 너무 빨리 배우는 게 아닐까?


주인공 옆을 빠르게 걸어가는 엑스트라 아이를 본다. 그 아이는 시청자의 시선을 뺏지 않을 정도로 튀는 구석 없이 자연스럽게 배경이 되어야 한다. 현장 한 구석에서 기약 없이 대기하며 6x6 큐브를 맞추는 아이를 본다. 그 아이는 어른들의 칭찬에 조금 으쓱한 표정을 짓는다. 언제 끝나냐고 집에 가고 싶다고, 누구도 쉬이 입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하는 아이를 본다. 그 아이는 이른 더위에 얼굴이 빨갛게 익어 조금 지쳐 보였다.


이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 처음 받아 보는 시선, 처음 가보는 장소 속에서 상처받지 않고 오래도록 수다쟁이였으면, 계속해서 큐브를 맞췄으면 하고 바라본다. 오늘의 촬영을 마무리하며 어린이 배우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자고 다짐했다. 이들은 어제 같은 2020년도 까마득한 옛날로 여겨질만큼, 어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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