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과 선배와 나
회사 근처 pt샵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늘 활기차게 포니테일 머리를 흔드는 선생님에게 1:1 수업을 받는다.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 특유의 곧고 건강한 에너지를 지쳐 흐물대는 직장인인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다소 걱정이 되어 첫 상담 때 너무 무리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수강생의 그런 기운 빠지는 요청도 존중해 주는 듯하던 선생님은 몇 회차 만에 본색(?)을 드러냈다.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스트레칭에서 근력 운동으로, 가벼운 운동에서 땀이 나는 운동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전에도 몇 차례 pt를 받아봤지만 그때마다 느꼈던 내 문제는,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를 외칠 때 한 번 더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싼 돈 내고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늘 오래가지 못했다. 이미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일하고 있던 와중이라 그랬는지, 운동을 하다가 다칠까 괜한 걱정이 되어 그랬는지, 그냥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아무튼 그런 쪽으로는 딱히 욕심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만 같다. 계속해서 잘한다 칭찬해 주는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고, 한계 상황일 때 너무 바로 쉽게 힘을 빼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마지막까지 힘을 내고 나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운동이 끝나면 선생님이 근육을 풀어준다. 시시콜콜한 대화도 곁들인다. 요즘 운동하는 게 큰 활력소라고 이야기하니까 선생님은 잘 됐다며 인간은 원래 움직이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다.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 있다 온 터라 왠지 조금 찔려서 웃었다. 지난번 수업 때, 타지에서 일을 하다가 여의도에 왔더니 여긴 회원님들이 다들 환자들 뿐이라던 선생님의 농담처럼 이번에도 또 그런 류의 농담인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꽤나 진지했다. 그리고는 선생님은 내 어깨 근막을 꾹꾹 누르며 제가 해삼 이야기 안 해드렸나요? 하며 해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삼은 태어나서 자기가 정착할 곳을 찾기까지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곳을 찾아 정착하고 나면, 자기 뇌를 먹어치운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뇌를 쓸 필요도 없으니까. 쓸데없이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뇌 같은 건 먹어치우는 게 해법이었다. 해삼의 뇌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뇌가 있는 우리는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고 이리저리 돌아다닐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야기.
몇 년 전 힘든 프로젝트를 맡아 고생하고 있던 때, 함께 밤을 새우고 머리를 쥐어뜯던 한 선배는 본인만의 독특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가지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뇌 과학 책을 읽는 거였다. 괴롭고 짜증 나다가도 그 감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글들을 읽다 보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그땐 그저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했는데, 해삼의 뇌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그때 생각이 났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 내 뇌가 나름의 쓸모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선배도 그렇게 기댈 쓸모와 작동 원리 같은 걸 절실히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뇌를 먹어치우고 물결 사이에 정착한 해삼, 뇌 과학 책을 읽는 선배, 엄살을 떨며 부들부들 운동을 하는 나. 우리는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