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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끼장미 Jan 20. 2023

왜 쓰는지 내게 묻는다면

교사의 글쓰기

웅크린 말들

말해지지 않는 말들의 한(恨)국어 사전


1. 저자에 대하여 / 이문영

한겨레 기자로 일하고 있다. 필명(이섶)으로 동화 <보이지 않는 이야기>와 <이티 할아버지 채규철 이야기>를 썼다. <침묵과 사랑>에 글을 보탰다. 국제엠네스티언론상을 받았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글 쓰는 작가로 불리면서도 글을 쓰는 것이 힘겨웠다. 거리에서 돌이 날아다니던 시대의 슬픔도 나는 다 쓰지 못했다.

나는 다만 하나는 이겼다. 쓰지 않는 것. 언어가 시대를 바꿔 뜻을 배반할 때 언어의 변신과 대결하며 침묵하는 것, 쓰지 않는 것은 나 스스로에게 건 싸움이었다. 나는 쓰는 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일을 한 것이다.


글은 아무것도 아니다.


글이 무력한 시대에 처음부터 쓰이지 않는 것이 글의 복일 수도 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글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알 수 없는 곳에 꽁꽁 묶여 있다가도 언젠가는 기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조금씩 더고 조금씩 자기 일을 할 것이다. 그것이 그 글의 운명이고 그때가 그 글의 때일 것이다.


숨이 콱콱 막히는 세계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 이 세계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아봐 주는 한 사람이라도 각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난쏘공’의 난쟁이들이 자기 시대에 다 죽지 못하고 그때 그 모습으로 이문영의 글에 살고 있다. 이문영의 글이 자기 때를 어쩌지 못하고 기어 나와 그 한 사람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읽혔으면 좋겠다.


언젠가 때를 찾아 밖으로 나올 글이 내 안에 남아 있다면, 이문영의 글들이 그 글들을 만나 서로의 꺾인 허리를 받쳐 주는 날이 온다면,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꾸밀 힘이 우리 사이에 조금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 소설가 조세희 -


2. 목차

차례

들어가며

소리 잃은 검은 기침 / 석탄

집이 오는 과정 / 시멘트

첨단의 풍경 / 굴뚝

수리되지 않는 노동 / 서비스

세계의 밑변 알바

당신과의 전화 통화 끊겠습니다

보이는 것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것 얼룩

나와 그대의 이야기 백골

최저보다 아래 한국

텐진 델렉이자 라마 다아 파상이면서 민수 우리나라

천국을 위한 천국 천국

사랑이 지운 사랑 표준국어대사전

오직 낮은 땅의 전쟁 물

우리의 전선, 그들의 전선, 전기

가난한 꿈의 연표 밀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섬

지구의 침몰 세월

나오며

추천하며

찾아보기

사진 일람


3. 가슴을 치고 들어온 구절

7> 들어가며

두 세계를 구성하는 두 언어가 있다.

 언어는 거울이면서 거짓이다.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삶을 비틀기도 한다. 삶과 조응하기도 하지만, 삶을 조롱하기도 한다. 韓국어가 언어의 표준을 자임할 때, 표준에서 배제된 언어는 恨국어가 된다. 韓국이 국민의 표준을 지정할 때, 표준에 끼지 못한 사람은 恨국에 산다.


478>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다.

오랜 시간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김현우 옮김, 열화당, 2017)


 애써 말해야 하는 삶들이 있다. 말해질 필요를 판단하는 것이 권력이고, 말해질 기회를 차지하는 것이 권력이다.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권력과 거리가 먼 존재일수록 말해지지 않는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말해지도록 길을 내는 언어가 절박하다. 의미가 파괴된 말의 잔해로는 韓국과 恨국 사이의 장벽을 드러낼 수 없다.


 말해질 기회를 소유한 사람들의 한국어가 언로를 획득하고 기록으로 쌓일 때, 말해질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한국어는 누락되고 기록 없이 새어 나갔다. 권력자들의 기록이 역사의 자리에 앉는 동안, 권력 없는 자들의 비역사는 ‘이야기’로 전파됐다. 이 책 웅크린 말들은 이야기로 포착한 한국어들의 모음이다.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존재들과, 그 존재들의 삶과 그 존재들이 처한 사실을 이야기에 얹어 말의 길을 내려 한 무능한 실험들이다. 이야기하기 위해 차용한 형식들은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다. 다큐여도 좋고, 문학이어도 좋다. 기사여도 좋고, 르포여도 좋고, 논픽션이어도 좋고, 소설이어도 좋다. 단지 무엇이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가를 맡는 질문으로, 어떻게 말해야 말해질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말해져야 할 것들이 말해지도록 ‘빈 곳을 메우는 일’로 다만 그렇게 읽힐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定義(정의)되지 못한 존재들을 정의하는 것이 正義(정의)다


 한국어들을 찾아내고 정리하는 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사전을 엮는 일이다. ‘한국어 사전’을 채워가는 일은 ‘韓(한) 국어사전이 정의하지 않는 삶들을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국어사전엔 대한민국이 누락한 대한민국이 있고, 우리에 끼지 못한 우리가 있다. 한국어 사전은 표준의 언어보다 표정 있는 언어에 주목한다. 한국어 사전이 표준과 비표준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편지할 때, 한국어사전은 표준에 외면당한 은어, 속어, 조어로 한국을 본다. 각자가 사는 지역과 처한 현장과, 속한 노동과, 견디는 삶과, 흘리는 눈물과, 머금은 웃음과, 당하는 차별의 언어들이 조각을 맞추는 동안 ’ 한국의 뒷면이자 한국의 정면‘이 포착되기를 기대한다. 그 언어들로 두 한국 사이의 숨은 경계를 파악하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말해지지 않던 것들이 말해지며 두 세계를 분리해 온 장벽도 낮아질 것이다


 그저 그런 이야기의 전복성을 믿는다.


 이야기의 울림은 사건의 크기와 무관하다. 사건의 크기는 사람의 지위와 무관하고, 사람의 지위는 사람 그 자체와 무관하다. 무관해야 할 것들이 무관하지 못한 세계에 말의 차별이 있다. 우리가 집을 짓고 그 집을 덥혀 온기를 얻을 때, 도시를 밝히고 그 편리 아래서 먹고 사랑할 때, 더러움을 지워 깨끗함을 얻고 병균을 가둬 청정을 보장받을 때, 우리의 편안한 일상은 ’ 우리 밖‘의 가혹한 현실 이에 서 있다. 우리의 무탈을 위해 위험해지는 땅과 우리가 외면한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 그들을 몰아넣고 밀어내며 유지되는 나라.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환의 끝엔 결국 우리가 있다. 말해지지 않는 존재들로부터 멀어지는 말하기 방식은, 나, 당신, 우리, 이 세계 모두로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세기적 사건의 충격보다 끊어낼 수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 쌓아 온 이야기의 전복성을 믿는다. ’ 우리‘의 편안한 일상을 지탱하는 ’ 우리‘의 가혹한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 이 시대 언어와 문자의 최전선이다.


 4. 리뷰

『웅크린 말들』을 읽고


생태계에는 생물과 생물, 생물과 환경이 서로 적응하며 조화를 이루어 살아간다. 연못 생태계를 예로 들어볼까? 연못에 사는 식물은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 곤충과 물고기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연꽃 같은 식물은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해주기도 한다. 연못을 비추는 햇빛은 물풀이 잘 자랄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생태계를 이루는 생물의 종류와 수가 급격히 변하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 생태계의 평형‘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태계의 평형 이면에는 유기체 간의 포식과 의존 관계의 질서가 존재한다. 결국 먹이사슬의 꼭대기는 강한 육식동물의 차지가 된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이성을 지닌 인간이 이루어낸 사회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포식과 의존 관계의 질서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결국 인간 생태계의 꼭대기는 강한 권력을 지닌 자들의 것이 되고, 짓눌린 사람들의 고된 삶은, 생태계의 평형을 유지시키기 위해 정당화된다.


국가적 환란 앞에 짓눌린 그들의 삶은 구겨지고, 그 속에 묻힌 이야기들이 웅크려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와 피라미드를 한바탕 뒤흔든다. 거칠게 느껴지는 흔들림 덕분에 마음이 요동치고 속이 메스꺼웠다. 평형의 한 귀퉁이에서 누려온 내 삶이 미안해 눈물도 났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평온함 밑에 웅크린, 아직 못다 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많을까? 먹먹한 마음을 쓸어내리느라 힘에 겨웠다.


 우리가 집을 짓고 그 집을 덥혀 온기를 얻을 때, 도시를 밝히고 그 편리 아래서 먹고 사랑할 때, 더러움을 지워 깨끗함을 얻고 병균을 가둬 청정을 보장받을 때, 우리의 편안한 일상은 ’ 우리 밖‘의 가혹한 현실 위에 서 있다. 우리의 무탈을 위해 위험해지는 땅과 우리가 외면한 일을 대신하는 사람들. 그들을 몰아넣고 밀어내며 유지되는 나라.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지는 그 순환의 끝엔 결국 우리가 있다. 말해지지 않는 존재들로부터 멀어지는 말하기 방식은, 나, 당신, 우리, 이 세계 모두로부터도 멀어질 것이다. 세기적 사건의 충격보다 끊어낼 수 없는 그저 그런 일상이 쌓아 온 이야기의 전복성을 믿는다. ’ 우리‘의 편안한 일상을 지탱하는 ’ 우리‘의 가혹한 현실을 발견하는 것이 이 시대 언어와 문자의 최전선이다. -p 480


 나의 평온한 일상을 지탱해 준 그들의 삶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뻔했다. 너무 오랫동안 웅크려 있어서 사라질 뻔했던 그들의 이야기들이, 이렇게 세상으로 나와주어 고마웠다. 견디어준 웅크린 사람들의 삶이 고마웠고, 그들의 삶을 지나치지 않고 글로 써준 저자가 고마웠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날개를 달아준 출판사에 고마웠고, 그 이야기를 권해준 선생님께 감사했다. 웅크린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에 감사했고,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도 감사하다.


 『웅크린 말들』을 읽고 나니, 글 쓰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보다 약한 타인을 억압했던 적은 없는지, 그들의 이야기를 웅크리게 했던 것은 아닌지......


글쓰기에 대해,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었을까?

내가 쓰고자 했던 글은 생태계의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글인가?

웅크려 있던 恨(한) 국어였을까?


내가 살아가는 삶의 최전선에도 웅크린 삶은 존재한다.

어디가 아픈지  알지 못한 채 스스로를 자책하며 벌하는 아이들의 삶,

책임지는 어른이 없어 상처받은 저희들끼리 생채기를 내는 아이들의 삶,

하루종일 화장실과 계단을 청소하고 계시는 청소 여사님들의 삶,

밥벌이로 하루하루를 견디는 쓸쓸한 노(盧) 교사의 삶,

무너진 교권 아래 신음하는 교사들의 삶,

육아와 일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워킹맘의 삶....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내게 남아 있다면,

그 글이 이런 글이 되면 좋겠다.


말해지지 않는 존재들에게 다가가는 글,

말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가에 답하는 글,

말해져야 할 것들이 말해지도록 ’ 빈 곳을 메우는 글‘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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