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향이 거리에 가득한 도시
2015년 12월 12일.
나는 멕시코시티의 친구 집에 큰 짐을 내려두고 군용 배낭 하나만을 매고 패기 좋게 3개월 여정의 첫걸음을 뗐다. 첫 목적지는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스페인어이지만 어감이 우리말 같아 왠지 모르게 친근한 느낌이 드는 이름의 도시였다. 멕시코 시티에서 보고타까지의 비행 시간은 약 4시간 반 정도다.
나름 경비를 줄이고자 하는 목적으로 멕시코시티 - 보고타 간 왕복표를 끊었던 것이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건 그다지 훌륭한 선택이 아니었던 것 같다. 3개월 간의 여행을 마치고 멕시코로 돌아갈 땐 결과적으로 칠레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보고타로 돌아와 비행기를 갈아타고 멕시코로 가야만 했었다. 물론 여행 일정을 수미상관 형식으로 보고타에서 시작해 보고타에서 마무리한다는 의미에서는 참 좋았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방문한 보고타에서 2박 3일을 보내고 이동할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보고타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찾았던 건 여느 도시에서처럼 대중교통 편이 아니라, 공항 내에 위치한 백신접종센터였다. 볼리비아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황열병 예방 접종 증명서가 필요했는데, 보고타 공항에서는 해당 예방 접종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있었다. 여행 경로를 미리 계획하는 것을 선호하진 않는 나로서는 갑자기 볼리비아로 입국하게 될 상황이 생겼을 때, 예방접종 카드가 없어 입국 불가한 상황을 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멕시코에서 출국 전부터 예방 접종 가능 병원을 알아봤었는데, 비용이 최소 한화 50,000원은 들었기에(멕시코는 의료비가 정말 비싸다), 이리저리 검색을 하던 와중 보고타의 공항에서 예방 접종을 무료로 해준다는 유용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아침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의 대기를 하지 않고 순식간에 예방 접종을 마칠 수 있었다.
보고타 국제공항의 이름은 El Dorado라는 꽤나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 '엘도라도'가 맞다. 나는 사실 엘도라도라는 말을 오며가며 듣기만 했지 한 번도 그 의미의 유래나 배경 설화에 대해서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보고타 시가 그 옛날 스페인 정복자들이 혈안이 되어서 금광을 뒤졌던 대표 지역이었다는 사실은 내게 꽤나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El은 남성형 정관사(영어의 the와 같은 역할)이며, Dorado는 '금색의, 금의'라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El Dorado는 금빛을 한 사람, 금빛의 장소를 뜻하는 의미이다.
이는 El Dorado 전설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전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Guatavita 호수로 보고타 북쪽 해발 2,700미터 사화산(死火山) 화구에 생긴 호수이다. 전설에 따르면, 해당 지역 원주민인 칩차 족의 추장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가루를 몸에 바른 뒤 구아타비타 호수에서 몸을 씻고 많은 보물을 호수에 던졌다고 한다. 따라서 El Dorado는 금빛 모습을 한 추장일 수도 있고, 수많은 보물이 던져져 금빛이 난다고 믿어지는(?) Guatavita 호수로 해석해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호수의 물을 빼고 그 밑에 가라앉은 보물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수 차례 있었지만 실패했고, 콜롬비아 정부가 구아타비타 호수를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면서 구아비아타 호수의 보물은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백신 접종을 마치고 나는 잠깐 공항 의자에 앉아 핸드폰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 지를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있던 한 젊은 콜롬비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내 사정을 들은 그 친구는 자신도 Centro로 가는 길이니 나와 함께 동행해주면서 도시의 가볼 만한 곳들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공항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 Iván은 너무도 빨리 보고타, 나아가서는 콜롬비아에 대해서 아주 좋은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도심을 오가는 보고타의 체계적인 교통 시스템은 사실 매우 의외였다.
Iván은 공항을 나서면서 내게 콜롬비아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내게 선물이라며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고타의 BRT(Bus Rapid Transit) 전용 교통카드였다. 고맙게도 자신은 여분의 카드가 있다며 나에게 카드를 선물했다. Iván의 도움을 통해 어렵지 않게 교통카드 금액을 충전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콜롬비아는 실제로 여행객들이 중남미에서 기대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한 나라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이다.
BRT란 Bus Rapid Transit의 약자로 한국에서는 간선급행버스체계라는 이름으로 운용되고 있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서울에서 매일 이용하고 있는 버스 전용차로, 환승터미널 등의 개념이 집합된 선진적인 대중교통시스템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 경부터 서울 및 대전에 시범적으로 시행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보고타 시에서는 2000년 12월부터 정식 운행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여행 이전의 나를 포함한 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콜롬비아 미녀(정말 사실이다)들과 마약왕 Pablo Escobar에 대해서는 친숙하지만, 콜롬비아의 의외의 선진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았던 나라는 단연코 콜롬비아였다.
콜롬비아는 실제로 여행객들이 중남미에서 기대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한 나라에서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나라이다. 콜롬비아의 중심에는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보고타가 있고, 북서쪽으로 가면 콜롬비아 대표 화가 Botero의 미술 작품과 미녀들로 가득찬 세련된 도시 메데인이 있다. 동쪽의 베네주엘라와 브라질 접경 지역으로 가면 아마존 우림을 충분히 느낄 수 있고, 북쪽 끝까지 가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캐러비안 해안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어떤가. 듣기만 해도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Iván과 나는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콜롬비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야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는 젊은 나이에 자기 소유의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능력있고 열정 넘치는 젊은이였다. 무엇보다 나에게 보고타와 콜롬비아에 대해 이야기할 땐 언제나 열정이 넘쳤다. El Dorado 공항에서부터 Centro로 향하는 길은 마치 서울 교외 지역으로부터 서울 중심으로 들어가는 느낌과 비슷했다. 주말이면 아버지와 나섰던 교외 드라이브에서 매번 느꼈던 건 차로 30분 정도 나섰을 뿐인데 창밖의 모습은 내가 익숙한 서울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변화가 너무도 급격해서 나는 종종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보고타 시의 모습도 그와 비슷했다. 다만, 그 땅의 규모가 훨씬 더 크고 광활한 뿐.
Iván은 우리가 지금 지나가고 있는 Bogotá 교외 지역 중 다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거리를 걸어다니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곳곳에는 수많은 쓰레기 더미가 무분별하게 흩어져있었고, 노숙자들이 그 주변에 대낮부터 널부러져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3~40분을 타고 왔을까. 우리는 어느 새 보고타 시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었다. 위의 사진은 그 보고타의 중심에서 찍은 사진으로, 이 사거리의 풍경은 전차길 때문인지 옛 경성의 길거리가 연상되었다. 보고타의 전차는 1910년부터 운행되었고, 1951년 이들이 버스로 대체된 후부터는 이 전차길은 상징적으로만 남아있다. 하지만 보고타에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커피 문화였다.
콜롬비아 (특히 보고타가 가장 많은 것 같다) 골목 골목에는 위와 같이 보온병으로 채운 수레를 들고 커피를 판매하는 아저씨들이 무수히 많다. 이들이 판매하는 커피를 흔히 Tinto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콜롬비아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할 때, 우유나 크림없이 순수한 커피로 주문할 때도 사용한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아저씨들이 판매하는 Tinto는 스티로폼 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로 보통 사탕수수가 들어가 있어 달달한 맛이 난다. 우리가 먹는 인스턴트 '믹스 커피'랑 비슷한 셈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콜롬비아 길거리의 Tinto는 우유나 크림이 포함되지 않은 점이다.
여행을 특별하게 하는 요소들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분명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나는 사실 커피 그대로의 맛을 참 좋아해서 단맛이 더해지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Tinto는 분명 그 고유의 매력이 있었다. 커피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사탕수수의 맛은 설탕의 맛과는 또다른 질감의 단맛이었다. 그리고 나처럼 커피를 좋아하지만 카페인에 예민해서 많이 먹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더욱 적절한 양이었다. 잔당 가격도 100~200원 남짓이라 부담없이 여러 골목의 Tinto를 맛보는 것은 보고타 여정에서의 큰 즐거움이었다.
Iván은 나와 함께 보고타에서의 첫 식사를 함께 했고(보고타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첫 식사를 대접하기까지 했다), 내가 마땅한 숙소를 구할 때까지 동행해주었다. 여행 처음부터 이런 친구를 만난 나는 정말 운이 좋아도 너무 좋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내가 3개월간의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멕시코로 돌아가기 전 다시 보고타를 찾았을 때 Iván은 다시금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여행을 특별하게 하는 요소들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분명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 도시에서 만나는 사람이 그 도시에 대한 이미지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고, 내 기억에 다채로운 색을 더해준다. Iván은 내 기억에 아름다운 색을 칠해줬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내 여정에 대한 긍정적인 추진력을 더해주었다.
보고타에서의 내일이 기다려졌다.
Muchisimas Gracias, Iván. Siempre me quedas en mi memoria.
(고마워, 이반. 언제나 기억할게.)